[100대 사건_012] 국산 전전자교환기(TDX-1) 상용서비스 <1986년 4월>

“저의 연구소 연구원 일동은 최첨단 기술인 시분할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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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개통한 시분할 전자교환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전신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최순달 소장과 양승택 선임연구부장 등 보직자들이 전전자교환기(TDX-1) 개발을 시작하며 체신부에 낸 서약서 내용이다. 당시 한국통신 TDX사업단장을 맡고 있던 서정욱 전 과기부 장관이 이를 두고 `대단한 혈서를 썼다`고 표현하면서 그때부터 `TDX 혈서`로 회자됐다.

◇전화 한 대가 집 한 채=1970년 산업화와 함께 전화수요가 급증했다. 1961년 12만대에 불과하던 가입 전화 수는 1970년에 50만대, 1975년에 100만대를 돌파했다. 1976년에는 가입전화 수가 약 139만대, 전화 보급률이 인구 100명당 3.4대로 1971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전화 적체 현상도 갈수록 심각해졌다. 1972년 1만3000여건이던 전화 적체 수가 1978년에는 60만건에 가깝게 늘어났다. 신규 전화는 신청에서 설치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사실 정부는 전화 적체 문제 해결을 위해 백색, 청색 전화 제도를 도입했다. 1970년 8월 31일을 기준으로 이미 가입돼 있는 전화 45만대는 양수양도가 가능한 백색전화, 이후 가입한 전화는 양도가 불가능한 청색전화로 못 박았다. 하지만 전화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1980년에 와서는 백색전화 한 대 가격이 당시 작은 집 한 채에 해당하는 20만원에 이르렀다. 전화상 600곳이 난립하면서 전화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까지 등장했다. 당시 전화 적체 건수가 60만대나 됐다.

정부는 이에 1981년 농어촌 전화 현대화 계획을 세워 농어촌지역 시분할 방식 전자교환기 도입 사업을 추진했다. 한국형 모델 개발과 국산화 기술 전수,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의 핵심기술 제공, 공급가격과 공급시기를 고려한 중용량 시외 교환기와 농어촌 교환기를 공급한다는 내용의 중간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정부는 체신부 장관 소속으로 `시분할 교환기 개발 추진위원회`를 꾸렸다.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현 KAIST 이사장)이 최순달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소장과 경상현 선임연구부장을 불러 기술 개발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 아래 1982년부터 5년간 연인원 1300명, 총 240억 원의 연구비가 들어가는 TDX 개발 계획안을 체신부에 제출했다.

당시 전기통신연구소 1년 예산이 24억원이었고, 전자교환기 연구비가 1억6000만원이던 상황에서 TDX라는 단일 과제 개발에 매년 50억원씩 쏟아붓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개발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교환기 증설에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했다.

당시 쓰던 기계식 교환기 증설은 장기적, 경제적 측면에서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됐다. 기계식 교환기 용량을 확대하면 사용 중 혼선이 생기고 유지보수 비용이 과다하게 소요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전자식으로 옮겨가던 외국의 교환기 추세에도 어긋났다.

문제는 우리가 전자교환기 개발 역량이 있는지였다.

1, 2차 시험기는 개발해 놨지만, 국설용 교환기 개발은 진전이 더뎠다. 이때 양승택 전 정통부 장관이 전자교환기 개발단장으로 영입되면서 실마리를 풀었다. 우선 전체 개발 체계와 방법론을 정립하고 기술문서에 따른 정확한 기능을 정의했다. 기술진을 해외 파견해 기술 규격서에 따른 개발 책임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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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X 200만 회선 개통 기념 행사

◇1987년 가입자 1000만명 시대 돌입=1985년 대용량 전자교환기 TDX-1이 드디어 개통됐다.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 이어 세계 열 번째 디지털 전자교환기 생산국이 됐다. 1987년에는 TDX 대량 보급으로 1가구 1전화, 전국 전화자동화, 전화가입자 1000만명 돌파 등을 동시 달성하는 개가를 올렸다. 1970년대부터 추구해온 `신청 즉시 전화 개설` 숙원이 해결된 것이다.

1991년에는 10만회선 규모의 대용량 디지털전자교환기 TDX-10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한 해 222만회선을 공급했다. 양적으로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가구당 비율로는 세계 처음이었다.

전화가입자 1000만명을 돌파한 지 6년 만인 1993년에는 2000만명으로 늘었다. 전화보유 수도 세계 8위국이 됐다.

양산은 당시 LG정보통신과 삼성전자, 대우통신 등이 맡았다. 통신 장비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베트남, 필리핀 등으로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TDX-10은 CDMA용 교환기로도 사용돼 CDMA 기술 상용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통신강국 코리아의 초석이 이때 놓인 것이다. 이는 휴대인터넷 와이브로 첫 상용화와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상용화로 이어졌다.

지난 2001년 ETRI가 분석한 경제효과에 따르면 TDX 개발에 모두 1500억원을 투입했다. 내수로 인한 수입대체 효과는 4조3406억원, 수출 1조458억원 등 5조 3864억원의 경제효과를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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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환 전 ETRI원장(현 고려대 교수)

◆<인터뷰> 임주환 전 ETRI원장(현 고려대 교수)

“참여 연구원들이 모두 비장한 각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개발에만 전념했습니다. 연구비가 충분히 확보돼 있었기에 연구원들이 연구과제 수주를 위해 서울을 오가며 공무원을 만나거나 설득하는 잡다한 일도 없었습니다.”

TDX-1 개발 당시 ETRI에서 교환시스템 연구실장을 맡았던 임주환 고려대 세종캠퍼스 전자 및 정보공학과 객원교수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렸다”며 “당시 혈서를 써 체신부에 제출했다는 얘기까지 나왔었다”고 회고했다.

임 교수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제4대 ETRI 원장을 지냈다.

임 교수는 “1980년대 초반은 금성(현LG)이 미국의 AT&T, 삼성은 ITT(현재 알카텔), 동양전자통신은 에릭슨과 손잡고 외국 전자교환기를 국내에 파는 대리점 역할을 하고 있던 시절”이라며 “국내에서 전자교환기를 개발한다는 것에 업체들은 냉소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들 업체는 초기엔 개발된 기술을 이전해가는 데도 소극적이었다. 전문가조차 전자교환기의 국내 개발은 무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사람도 나왔어요. 사실, 우리나라 전반적인 기술 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해냈습니다.”

임 교수는 이 성공이 대한민국과 ETRI가 향후 정보기술(IT) 자립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인이 됐다고 술회했다.

ETRI는 그후 용량이 10배 증가된 대도시형 ‘TDX-10’을 개발했다.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상용화 4년 만에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것이다.

임 교수는 “유선 전화용 TDX를 성공시키고 난 다음인 1990년대 초 휴대전화용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며 “CDMA 무선 기술의 일부는 퀄컴에서 도입했으나 대부분의 시스템은 TDX 기술이 기반이 됐다”고 설명했다.

ETRI 원장을 지낸 인물답게 향후 ETRI가 걸어가야 할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ETRI는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기술개발에 도전해야 합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과제를 해야 합니다. 연구비는 총액으로 원장이 책임지고 집행할 수 있도록 해 연구원들이 과제를 따기 위해 길거리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와 너무나 달랐던 과거의 연구 환경을 비교하기도 했다. TDX-1 과제가 1986년 완료된 뒤 임 교수가 교환시스템실장을 맡고 있을 당시 1987년부터 5년간 560억원이 들어가는 TDX-10 과제를 준비했는데, 과제 협의를 위해 단 한 번도 체신부에 출장을 가 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 교수 당시의 아쉬움도 드러냈다. 당시 연구개발을 성공시킨 연구원 처우나 대우가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지나치게 연구원들의 애국심에만 의존했다는 얘기다.

“정통부가 없어지고 우리나라 IT가 위기에 처한 것이 제일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음 정부에서는 ICT 독임부처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ICT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박희범 기자 hbpar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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