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정의 어울통신]우편의 역사, 통신의 역사

우편이 통신인가.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우정사업본부 얘기다. 부처 개편 논의가 달아오르면서 우본의 정체성도 덩달아 논쟁거리가 됐다. 더 적확하게 말하면 우본의 업무 특성이 소관부처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점이다. 조직과 자금력을 갖춘 전국 조직이라는 특성 탓이 클 것이다.

과연 우편은 통신일까.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자. 기록상으로 보면 우편은 487년 신라 소지왕 때 국가 공문서 전달을 위해 우역(郵驛)을 설치한 것이 시초다. 우역으로는 고역전과 경도역이 처음이다. 당시에는 군사 혹은 공무로만 사용됐다. 문자의 발명과 동시에 개인적인 정보 전달과 통신 수단으로서 우편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일 것이다.

군사와 공무의 연락 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통신이다. 우역은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하달하고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고사항을 전달했다. 주로 인편과 말을 이용했다. 좀 더 발전된 형태도 있다. 비둘기를 이용하거나 연을 만들어 활용하던 행태를 연상하면 된다. 활을 쏴서 알리거나 봉화를 올려 활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근대적 관점에서 우편은 조선 고종의 `우정사(郵程司)`가 시발점이다. 1882년 교섭통상아문 산하에 설치됐다. 우편 업무 차원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우정총국(郵政總局)`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당시에는 5문, 10문짜리 우표를 발행했다. 군사와 공무로만 사용되던 우편이 누구든 돈만 내면 사용 가능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우편은 통신이다. 그런 우편에 정보기술(IT)이 접목됐다. 근대적 의미의 통신이다. 속도 문제가 해결됐다. 1885년 한성전보총국의 개설이 그것이다. 서울과 제물포 간 최초의 전신이 개통됐다. 서울-평양-의주, 서울-부산, 서울-원산 등 전국적인 전신망이 잇달아 개통됐다.

전화 도입 이후 전기와 철도가 개통됐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896년에는 궁중과 정부 각 부처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 전화시대가 개막됐다. 직접 대화가 가능해졌다. 당시는 중국식 음역인 덕률풍, 득률풍, 다리풍, 덕진풍 하던 전화기를 기계라는 의미의 `전어기` 혹은 `어화통`이라 했다.

통신은 속도다. 이전의 우정제도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의사 전달 속성이 강한 `우편`의 기능에 충실했다면, 근대적 의미의 통신은 IT를 이용한 `인터랙티브`한 기능에 주안점을 뒀다. 속도가 중요한 의미가 된다. 특히 근대적 의미의 IT를 기반으로 한 통신은 오늘날의 인터넷 못지않은 대변혁의 기틀을 제공했다.

우편이 통신수단인 것만은 아니다. 곡물을 중앙으로 이송하는 수송 기능까지 겸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택배, 물류 기능을 포괄했다. 현대에 와서는 물류와 금융 업무까지 포괄적으로 하게 했고, 비중 또한 커지고 있다.

지금은 어떤가. 지식경제부 산하 우정사업본부는 전국 3700여개 우체국을 관장한다. 직원만 4만5000여명에 이른다. 금융과 물류 업무가 확대되며, 전국 조직의 특성상 선거 때의 역할론에 많은 시선이 쏠린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부쩍 우본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정권 교체기를 맞아 부처 개편론이 높아지면서 그렇다. 민영화 얘기도 그렇고, 지경부 업무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얘기도 그렇다. 행안부, 방통위, 재정부, 금감위, 문화부 등이 군불을 때는 모양새다.

분명한 것은 우편은 통신이라는 점이다. 물류 비중이 커졌고 정부 직접 금융이란 역할론도 커졌지만 역사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우편이 통신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정보사회총괄 부국장 sjpar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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