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IT기반의 비즈니스 혁신은 주로 대기업의 화두였다. 변화를 주도할 조직이나 변변찮은 정보시스템 하나 없는 중소·중견기업들은 고작 전사자원관리(ERP)나 고객관계관리(CRM) 등 일회성 정보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정도였다. IT기반의 비즈니스 혁신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도 이를 체계적으로 추진할 만한 지식과 사람이 없다 보니 단순히 외형적 IT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만 매몰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도약을 꿈꾸는 일부 중견기업들을 중심으로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매출액 수천억원, 많게는 1조원의 꿈을 향해 회사의 DNA를 바꾸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기술과 제품으로 성공적인 벤처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면, 이제는 IT기반의 비즈니스혁신을 통해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DNA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IT기반의 비즈니스 혁신을 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대상과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업무 방식을 바꾸고 회사 곳곳에 제대로 정보가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관건이다. 특히 중견기업들은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지속적인 혁신활동이 쉽지 않은 만큼 독자적인 혁신 DNA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정보화 혁신에 성공한 기업들의 공통점이다.
◇`1조의 꿈`…“내 몸에 잘 맞는 옷부터”=2007년 이후 매년 평균 15% 이상씩 매출액이 성장한 경동나비엔은 보일러 업계의 신화 같은 존재다. `10년내 글로벌 톱10 진입`을 목표로 내건 경동나비엔은 지난해 매출 약 3000억원 가운데 35%가 수출이다. 2009년 러시아 시장에 첫 진입한 지 2년 만에 점유율 1위를 꿰찼다.
내수 기업에서 수출 기업으로 변신에 성공한 경동나비엔의 성과는 CEO가 2000년대 후반부터 직접 지휘한 전사적 혁신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혁신 인력도 CEO가 직접 뽑았다. `모든 것의 중심은 품질이다`를 화두로 시작한 경동나비엔의 혁신 노력은 ERP를 비롯한 전사적 프로세스혁신 및 정보화 혁신으로 이어져 지난 4월까지 계속됐다.
아직 열기가 남은 이 프로젝트는 CEO가 직접 2명의 PM을 발탁해 전 기간 주도하도록 했다. 해당 부서 팀장들도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많은 중소·중견 기업들이 혁신에 실패한 가장 큰 배경이 바로 인력 구성과 의사결정 프로세스 문제, 성급한 시스템 도입이란 점을 간파한 것이다.
2009년 품질 수준을 높이기 위해 개발 업무 혁신에 돌입해 전사적인 품질 정보의 통합을 시도했다. 법인과 부서별로 각기 따로 쓰던 품질 관련 정보를 하나로 모으고 각 나라별 정보를 하나로 모아 본사와 중국 생산법인, 미국 판매법인이 빠르게 의사결정할 수 있는 글로벌 ERP 시스템으로 바꿔 나갔다. 경동나비엔 관계자는 “경영 인프라를 고도화하기 위한 전사적 통합시스템이 필요했다”면서 “수출기업으로서 품질관리를 위한 전사 업무의 표준화를 꾀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자재명세서(BOM) 통합부터 시작해 제품수명주기관리(PLM) 전반에 걸쳐 모든 품질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체계를 그려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비즈테크앤엑티모 관계자는 “품질이라는 테마, 수출을 지향하는 비즈니스 변화를 포괄하는 하나의 큰 방향성을 놓고 이에 부합되는 IT를 찾아나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대기업을 흉내내기 보다 직접 비즈니스 가치사슬을 토대로 시스템 기획을 해 나갔다”고 분석했다.
가파른 성장으로 이미 1조원 매출을 달성한 휴맥스도 마찬가지다. 2004년 현업의 핵심 해외 영업 임원을 간판만 내건 `혁신실`로 배치한 휴맥스 CEO의 의지가 남달랐다. 무려 2년간 별달리 성과도 없었다. 휴맥스 혁신실 관계자는 “2년 간의 `잠복기`를 기다려준 대표께 고맙다”고 말했지만 실은 이 기간 혁신실 인력들이 설계한 개발과 공급망관리(SCM)에 관한 혁신 방법론은 훗날 중요한 혁신의 `엔진`이 됐다.
휴맥스 관계자는 “전문 혁신 인력은 아니었지만 `왜 우리에게 이 프로세스가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탐구와 함께 다양한 경영 이론부터 비즈니스 기법을 접목해 해답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이른바 개발과 공급망관리 영역에 `모델 베이스 혁신`을 접목하고 `이벤트 드리븐 혁신`을 위해 6시그마 방법론을 도입했다. 모델 베이스 혁신이란 잘 정형화된 방법론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벤트 드리븐 혁신이란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이용훈 휴맥스 혁신실 상무는 “우리처럼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대량 생산하는 회사가 많은 만큼 개발과 공급망관리(SCM) 영역에서 모델 베이스 혁신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기업 도약 위해 통합ERP 구축 관심=해외 법인이 많아질수록 정보 취합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모든 중소기업의 공통된 문제다. 분산되고 통일된 업무 코드 체계도 없다. 이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가장 많이 시도한 것은 정보를 표준화하고 글로벌 ERP 시스템으로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려는 것이다. 매출 규모가 늘어나는 동안 자회사 수도 증가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들을 하나의 IT체계 안에 넣는 것도 필요하다.
`2014년 1조원 매출`을 목표로 곧 동진디스플레이재료 등 자회사까지 통합한 글로벌 ERP 시스템을 가동하는 동진쎄미켐은 세계에 흩어진 자원을 한 눈에 파악하기 위해 프로세스와 IT 혁신에 힘을 쏟아왔다. 개발을 포함해 품질부터 성과관리까지 모두 ERP로 가능하도록 기틀을 마련했다.
동진쎄미켐 관계자는 “IT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프로세스 혁신의 도구”라며 “매출이 늘수록 정량적 데이터를 근거로 구매·생산·자재 등 모든 프로세스가 통합되면서 IT가 전사 프로세스를 정립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번의 이벤트성 혁신 활동이 아닌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국제회계기준(IFRS) 등에 대응하기 위한 글로벌 IT 체계는 해외 시장에서 도약하려는 중소·중견기업들의 필수 요건이 됐다. 국내 기업들의 이같은 글로벌 IT 체계 구현 노력은 실제 일본 등 해외 기업들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ERP 템플릿을 구매해 간 히타치그룹도 국내에서 성장한 기업들의 `글로벌 IT 기반 속도 경영`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컨설팅업계 한 관계자는 “약 300억~400억원 매출 시절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매출이 1000억원을 넘어가면 분리된 데이터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면서 “하나의 DB에 여러 회사 내용과 데이터를 담는 등 정보를 통합하려는 요구가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토종 커피 프랜차이즈 카페베네도 올초 글로벌 ERP 구축을 위한 프로세스 혁신에 돌입, 프랜차이즈·생산·영업·구매·자재·회계·인사 등 모든 조직과 업무가 IT로 통합되고 실시간 통합 정보처리가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할 계획이다. 카페베네 관계자는 “프로세스 혁신으로 선진 경영 프로세스를 도입함으로써 소프트웨어적 경영혁신과 스피드 경영을 실현할 것”이라며 “이를 위한 도구로 ERP를 구축해 프로세스 혁신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중견·중소기업의 과거 혁신 실패요인과 성공적인 해결방안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