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이 비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고리원전 직원들이 협력업체와 결탁해 폐기 부품을 반출해 새로운 제품인 것처럼 다시 들여와 금품을 챙긴 사실이 발각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한수원의 납품비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안전성을 걱정하던 여론은 이제 국내 원전산업의 주체라 할 수 있는 한수원의 도덕적 해이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원전 산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올겨울 연이은 원전 불시정지와 고리원전 1호기 정전은폐, 납품비리까지 터지면서 “이 기회에 대폭적인 물갈이를 해야 된다”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등의 비판과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수원 조직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다. 최근 한수원 신임사장 선임이 재공모에 들어간 것도 다양한 후문이 일고 있다. 심지어 한수원 내부에서조차 조직 내 간부들로 주축이 된 기득권의 실력행사로 유력후보가 중도 포기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총체적 부정이 사내 조직원들끼리도 믿지 못하는 `내부 불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자부심의 원전, 부정부패 상징으로=한수원 비리문제를 바라보는 산업계는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고구마 줄기 뽑듯이 줄줄이 나오는 각종 비리를 보면서 일각에선 “지금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자체 원전 보유국` `원전기술 국산화` `다섯 번째 원전 수출국`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국내 에너지 산업의 자부심으로 통했던 원전은 한 순간에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치부되고 있다.
고리원전으로 시작된 납품비리 의혹은 월성·영광원전과 한수원 본사로까지 확대됐다. 이미 고리원전 부품비리 관련자들이 전원 유죄 판결로 사법처리를 받았다. 고리원전과 같은 수법으로 중고부품을 신제품으로 위장해 이익을 챙기려 한 시도가 발각되고 한수원 간부가 협력업체에 금품을 요구하는 일도 벌어졌다. 최근에는 수의계약 청탁으로 금품을 챙긴 간부가 청탁이 이뤄지지 않자 기업으로부터 협박을 받는 등 부정의 천태만상을 보여줬다.
한수원 비리의 원인으로 그동안 많이 지목됐던 것은 입찰과 납품 관련 구조적인 문제다. 한수원과 특정 지정 협력업체의 사업 독식관계, 과도한 원전본부의 사업 결제 권한, 기술 국산화를 빙자한 특정업체 지원금 몰아주기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한수원이 가지고 있는 폐쇄적인 문화가 더해졌다.
원자력학회 일원인 A대학 교수는 한수원 조직을 군대와 비교한다. 안전성과 보안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으로 정보전달이 폐쇄적이고 팀별 조직도 군대와 다를 바 없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폐쇄적인 조직문화가 타 부서와의 단절을 초래해 비리의 환경을 제공했고 군대와 유사한 상하관계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할 수 있는 기능을 했다”고 분석했다.
◇자화자찬, 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군대와 같은 폐쇄적인 조직문화로 한수원은 협력회사에서는 이미 지루한 얘기가 되어버린 납품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2011년도 업무와 회계에 대한 자체 감사결과 회사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도의 위법·부당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수력원자력 감사실이 발표한 2011년도 연간 감사결과 종합 의견의 일부다. 한수원이 지난해부터 시장형 공기업이 되면서 감사활동 강화를 강조했지만 그 결과는 지금 나오는 비리 사건이 무색할 정도다.
최고령 원전으로 국내 원전산업의 상징에서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한 고리원전 감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본부장을 중심으로 노사가 협력하고 지역주민과 상생을 통해 안전 운전과 경영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하는 사업소”가 감사실의 평가다. 심지어 사업소 단위 권한행사를 위해 본사 주관부서의 과도한 간섭을 배제할 필요성까지 제기했다. 지적 사항으로 △계약 대금 지급기한 초과 및 지연이자 미지급 △정비업체 임의 지정과 구매 물품 외주가공 처리 △물품 반출입 시스템 미연계로 반입 사후관리 미비 등 다수가 있었지만 감사결과는 자화자찬이었다.
충분히 비리행위를 사전에 인지할 수 있었지만 정체된 조직 내에 만연한 비리 불감증이 이를 방치한 셈이다. 지난해 사내 부패신고센터에는 단 한 건의 제보도 없었다는 점, 납품비리 수사 중에도 또 다른 금품요구 행위가 있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신울진 착공식에서 원자력 산업계를 `고인 물`로 표현하며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구책 발표에도 냉랭한 시선=한수원은 최근 일련의 사건에 대한 대책으로 원전본부별 반부패 시민감시단을 발족하는 자구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비리행위를 적발할 수 있는 실질적 행동을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원전 자체가 국가보안시설로 관계자 외에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고 사내에서조차 옆 부서의 비리행위를 모르게끔 폐쇄된 조직에 정보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원전 협력업계는 납품비리 관련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한수원이 그동안 복지부동해오던 태도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발전설비 부품 2차 협력업체로 있는 외국계 회사 관계자는 “직접적인 거래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한수원의 납품비리 얘기는 협력사들을 통해 수차례 들어왔다”며 “신흥 개발도상국에서나 있을 법한 부정영업이 만연한 것을 한수원이 몰랐다기보단 모른 체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수원의 비리 행위가 협력사를 죽이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번 사건 관련 감사원 감사로 쑥대밭이 된 H사 대표와 친분이 있는 한 관계자는 “H사 대표는 업계에서 성실했던 사람으로 꼽혔던 인물인데 비리를 강요당한 측면이 많다”며 “한수원은 당사자만 처벌하면 되지만 협력업체는 회사의 존폐가 갈린다”고 쓴소리를 했다.
한편 한수원은 조직진단 용역과 감사원의 감사결과가 나온 후 추가적인 조직 쇄신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최근에는 내부적으로 24시간 부패신고센터를 구성해 지난 5년간의 비리행위에 대해 새롭게 신고를 받고 있다.
[소박스]한수원 쇄신, 안전과 혁신 사이
한수원이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원전산업계의 대안은 `안전 위주`와 `전반적인 쇄신`의 두 축으로 나뉘고 있다. 한수원 내부에서 조차 간부와 비간부 사이에서 관련 의견조율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안전 위주를 강조하는 진영은 드러난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만 쇄신방안이 원자력 안전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원전 안전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수원 신임사장도 혁신 중심의 인물보다는 기술적 배경이 있는 인물이 적합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원자력계 고위관계자는 “벌어진 현상에 대해서 집중해야 하고 일부를 전체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며 “최우선 가치는 원전 안전임을 인지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선에서 현 과제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반적인 쇄신을 강조하는 진영은 한수원의 재탄생을 요구하고 있다. 납품비리가 계속 확대되고 그동안의 원자력발전 정지가 비리의 결과물로 인식되는 지금 대폭적인 쇄신만이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으로 보고 있다. 신임 사장도 굳이 원전 관계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정부 및 관계 인사 신임사장 선임으로 원전 기득권층의 요식행위로 오해받기보다는 강한 혁신활동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인물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한수원 고위급의 원전 전문성 논란을 떠나 이미 비리행위로 안전성을 위협받고 있는 만큼 이제는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원자력 학계는 변화는 필요하지만 대대적인 쇄신은 위험할 수 있다는 중도적 의견이다. 분명 변화는 필요하지만 경영혁신에 따른 부패척결 효과를 정확히 수치화하기 어려운 만큼 쇄신의 정도를 가늠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조직이 변해도 비리행위는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오히려 임직원들의 인식과 조직문화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원자력학계 한 관계자는 “신임 사장은 원자력 지식 배경과 문제해결을 위한 결단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고 조직은 필요한 부문에서만 혁신을 해야 한다”며 “조직구조 개선과 비리근절은 감사실과 경영관리본부 기능 강화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조정형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