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정보통신 ‘철학’과 ‘정책’ 부족이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정부가 설정한 ‘IT 기반 융합을 통한 주력 기간산업 경쟁력 강화’와 ‘차세대 정보통신 기술 선점’이란 목표도 단순 구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기초체력 떨어져=통신 원천기술 투자 예산 감소는 대기업 착시 효과가 크다. 국과위 관계자는 예산 감소에 관해 “민간이 잘하는 분야보다는 활성화되지 않은 쪽에 투자가 쏠리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단말기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투자를 강화하고 있어 정보통신 분야는 정부 지원 필요성이 약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장 상황은 다르다. 국내 중소 통신장비업체는 서서히 경쟁력을 잃고 있다. 이동통신장비 분야는 국내 대기업, 네트워크 분야는 외국계 기업에 밀려 ‘샌드위치’ 상태다. 차세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원천기술 개발은 꿈도 꾸지 못한다.
정보통신 관련 출연연구기관 지원 역시 미약한 수준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의 지난해 예산 중 조건 없는 ‘안정예산’ 비중은 23~24% 수준에 불과했다.
ETRI 관계자는 “정부 출연연 중에서도 유독 심하게 대규모 사업 수행에 따라 예산을 받는 구조”라며 “이런 체제 아래서는 원천기술 개발 등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정보통신 투자자원 늘려야=정부 정보통신 R&D 투자가 지지부진한 것은 투자자원이 부족하고 이마저 집중도가 떨어진 탓이다.
정부 정보통신 투자는 상당 부분 정보통신진흥기금으로 운영된다. 정보통신진흥기금은 지식경제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나눠 쓰다 보니 원천기술 사업을 종합적으로 추진하기 보다는 ‘나눠먹기’식으로 쪼개질 수 있다.
정보통신학계 관계자는 “정보통신 담당 부처도 갈라져있고 사업도 쪼개지다보니 원천기술 개발 사업을 중장기적으로 끌어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기금 속성상 유동성이 크다는 것도 문제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관계자는 “IT분야는 정보통신진흥기금 의존도가 높고 그 마저 집행주체가 분리돼 사업별로 집중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며 “주파수 경매대금 유입으로 기금 규모가 늘어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정부정책 개선 시급=전문가들은 정부의 정보통신 철학 부재가 원천기술 R&D 홀대로 나타났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중견 통신·네트워크 업체 한 연구소장은 “최근 정부 정책은 한마디로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며 “정부가 설정해 놓은 국산장비사용 가이드라인마저 지키지 않는 경우가 빈번한 상황에서 원천 기술 개발 기대는 무리”라고 꼬집었다.
2008년 이후 정부 R&D 정책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보통신에 대한 전체적인 로드맵이 부실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원천기술에 대한 연구투자는 단기적인 성과가 아닌 장기 비전을 가지고 실행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과거 한국 정보통신 산업은 대규모 투자로 원천기술을 국산화하는 단계를 거쳐 4G 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민간투자가 활발하다는 이유로 국가 R&D를 소홀히 한다면 기껏 쌓아 놓은 경쟁력이 단기간에 허물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