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아름다운 퇴임

예전에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빨리 죽어야 할 텐데…”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오래 살고 싶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역설적 표현이다. 요즘 어른들은 “건강하게 죽어야 할 텐데…”라고 하신다. 평균수명이 80세가 되니 오래 사는 것은 기정사실인 만큼 활기차게 살다 깔끔한 모습으로 가시길 원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뒷모습에 아주 민감하다. 오죽하면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나. 죽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자리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가 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언제 나아가고 물러나느냐를 결정하는 것에 강박관념까지 있어 보인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이임식을 갖고 물러난다. 여권의 6 · 2 지방선거 패배가 세종시 수정안의 무리한 추진인 만큼 이를 책임졌던 정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거센 여론의 압박을 받은 지 2개월여 만이다. 정 총리는 이 기간 내내 언제, 어떻게 떠나야 하는 지를 놓고 밤잠을 설쳤다 한다. 책임은 져야 하는데 명예롭게 퇴진하는 방법과 국정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그의 고민의 중심이었다고도 했다.

10일 정 총리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아름다운 퇴임”이라고 추켜세웠다. 또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 결과는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전례 없이 좋은 표본이 됐다”고 평가했다.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사퇴 압박과 빗발치는 국민들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임을 다하고, 7 · 28 보선에서 여권이 다소 안정적 기반을 갖춘 상태에서 차기 총리에 바통을 넘겨줬다는 점을 말한다. 그 관점에서 정 총리의 인내심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직접 붙여준 `아름다운 퇴임`이라는 평가를 듣는 국민들로서는 더 쓸쓸한 울림만 남는 건 왜일까. 실력 있는 전문가, 존경받던 학자를 정치권에 끌어들여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이 같은 멍에를 지우고 내보내는 우리나라 정치 환경을 보면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전문가들이 정치권에 들어가 국정의 질을 높이고, 또 다시 민간이나 교단에 나와 그 경험들로 후진을 양성하고, 정치인들도 현장을 알기 위해 민간으로 나올 수 있는 선진적인 정치 문화와 인재 교류가 참 아쉽다.

정지연 경제과학팀 차장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