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장 외국인 교체,글로벌 표준 적용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정보기술(IT) 기업들의 ‘탈현지화(delocalization)’ 바람이 거세다. 기업문화는 물론이고 업무 체계까지 본사에 맞춘 ‘글로벌 스탠더드’로 빠르게 전환 중이다. 과거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해 앞세운 현지화 정책은 종적을 감췄다. 현지화보다 효율화·합리화가 우선 순위를 차지한다. 한국 고객만을 위한 지원도 점차 사라져 서비스 품질은 더욱 떨어지는 추세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진출한 주요 다국적 IT기업들이 지사장은 물론이고 시장과 접점을 이루는 사업부 조직 총괄임원까지 외국인 출신으로 교체하면서 현지화 정책을 사실상 접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기업홍보(PR) 부문이 해외 직할 체계로 바뀐 사례도 있다.
한국IBM과 한국마이크로소프트는 소프트웨어·컨설팅, 공공사업부·비즈니스마케팅 등에 각각 두 명의 외국인 임원을 임명했다. 한국에 대한 이해와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일선 사업부를 외국인이 총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 지사가 하나의 독립기업보다 판매 기지로 평가절하되면서 일반 기업에서는 찾기 힘든 기형적인 조직체계도 등장했다. 지사장이 조직 전체를 관장하지 않으며 일부 조직은 아태본부나 본사가 직할한다.
한국HP는 지난해 외국인 지사장 부임에 이어 올 초에는 본사 방침에 따라 기업홍보 조직을 아태지역 직할체계로 바꿨다. 한국HP 홍보 조직이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 소재 아태본부에 있는 셈이다. 한국과 달리 주요 신흥시장인 중국과 인도는 현지 담당자가 유지됐다. 새로 출범할 한국오라클-썬도 하드웨어(HW)사업을 한국이 아닌 아태본부에 맡길 예정이다.
탈현지화 배경은 다각도로 해석됐다.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기업이 나오면서 현지화한 제품·프로세스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는 고객이 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시장 성장세가 주춤하면서 본사가 한국의 예외성을 인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직·비즈니스를 한국 사정에 맞춰 유연하게 운영하더라도 매출 측면에서 큰 성과를 얻기 힘들어졌다. 2008년 글로벌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각 지사에 흩어진 기능을 중앙으로 통합해 비용을 줄이는 움직임도 작용했다. 그만큼 한국 고객과 시장에 대한 지원은 약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한국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서비스 정책, ‘한국’보다 ‘글로벌’을 우선시하는 ‘원(One) 컴퍼니’ 정책으로 인한 기업문화 충돌 등의 문제가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이호준·김인순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