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이석채 발언’ 공론화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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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여 전 방송위원회 시절이다. 한 방송위원이 당시 각종 현안을 명쾌하게 정리해 줬다. 고맙게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것까지…. 그러다가 툭 던진 한마디가 기자를 맥빠지게 했다. “근데, 내 의견은 9분의 1이야.”

 당시 방송위는 대통령이 3인, 국회의장이 3인, 국회 상임위가 3인을 각각 추천해 구성됐다. 많기도 한 데다 이해 관계가 다른 정치권이 나눠먹으니 의견 통일이 쉽지 않았다. 정책 결정에 혼선과 지연을 밥먹듯 했다. 피해는 방송사와 국민에게 돌아갔다. 현 정권이 들어섰고 방송통신위원회가 출범했다. 합의제의 틀을 유지했으며, 위원을 다섯 명으로 줄였다. 아홉 명이던 때에 비해 의사결정이 빨라졌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느리다. 방통위 간부들은 사안마다 다섯 명의 상임위원에게 일일이 사전 보고를 한다. 어느 정도 이해한 위원들이 의견을 나누기 위해 간담회를 연다. 의사결정을 위한 사전 모임이 아니라 업무 이해의 장이다. 충분히 사안을 이해했다고 판단되면 전체회의를 연다. 일련의 과정에서 이해를 못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이 나오면 직원들은 개별보고와 회의를 반복해야 한다.

 지난주 이석채 KT 회장의 발언이 방통위와 정치판을 들쑤셨다. 그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방송정책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통신정책까지 합의제 기구가 맡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야당 추천 위원이 부위원장이 되면 정부회의 참석 문제가 생긴다고도 지적했다. 외국의 IT전담부처 도입 움직임을 들어 옛 정통부 부활론까지 꺼내들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나와 파장이 컸다.

 방통위는 피규제 사업자 수장의 문제 제기에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합의제가 여론 수렴과 감시 효과가 있다고 반박했다. 속내는 다르다. 이 회장 발언에 원칙적으로 동감하는 방통위 관료가 훨씬 많다. 다만, 추진 중인 사무총장제가 자칫 유탄을 맞을까봐 걱정할 뿐이다. 민주당이 발끈하는 것은 당연하다. 야당 무시 발언에 화를 안 내는 게 더 이상하다. 더욱이 오는 9월에 부위원장직을 야당 추천 위원으로 바꾸기로 어느 정도 약속된 터다. 이를 깨려고 방통위 등과 교감해 이 회장이 총대를 멨다는 의심도 충분히 가질 만하다.

 그럴지라도 이 회장의 발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릇된 말이 별로 없다. 더 나아가자. 통신뿐만 아니라 방송 정책도 합의제 기구가 맡을 이유는 없다. ‘미디어 법을 놓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뭔 소리냐?’라는 반박이 벌써 들린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도 합의제 기구를 운용한다는 친절한 반론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도 실제 의사결정 구조를 보면 독임제에 가깝다.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를 넓히려는 이 나라들은 되레 옛 정통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미디어 법 논란만 해도 행정이 아닌 정치와 입법의 영역에 있다. 행정부와 국회 간 갈등이 아니라. ‘날치기’까지 시도하려는 여당과 본회의장 중앙 홀을 막고 농성 중인 야당 간의 싸움이다.

 합의제 독립성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사안이 많거나, 중립성을 훼손하면 존립 근거가 없는 행정기구에 적합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적절할 지 모르겠지만, 방통위는 아니다. 방송통신정책이 과연 방사성 폐기물 처리 정책과 입시 정책보다 더 합의제와 위원회 조직까지 필요로 하는가. 정치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검찰을 둔 법무부는 또 어떠한가. 방통위의 정치성은 방통위 자체가 아니라 이를 합의제로 둔 정치권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의 발언은 방통위를 정치로부터 순수 행정의 영역으로 옮겨가도록 하는 논의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신화수 취재담당 부국장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