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해 전 영국의 더 타임스는 가장 황당한 법률 25개를 선정했다. 가령 미국 버몬트주 법엔 ‘틀니를 할 때 반드시 남편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플로리다주엔 ‘일요일에 낙하산을 사용하는 미혼 여성은 체포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법이 있다. 프랑스에선 돼지에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불법이다. 옛 법률을 개정하지 않아 사실상 사문화한 것이지만, 권위의 상징인 ‘법’도 시대의 상식을 따라가지 못하면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법은 해당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집을 사고팔거나, 병원에서 수술을 받거나, 등산을 하거나 심지어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장난을 칠 때도 법은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돈다. 그렇다고 일반인이 법을 의식하고 살진 않는다. 법 조문을 줄줄 외거나 ‘이게 어떤 조항에 위배될까’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어기면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법’인데도 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법이 이미 익숙한 다른 형태로 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사이의 예의로, 가끔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혹은 사회적 도덕으로, 때로는 정의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자연스럽게 구성원들 사이에 스며든 법의 중간지대들은 모든 것을 ‘법대로’ 따지지 않고도 별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노자는 다스리지 않는 다스림, 즉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통치의 최고 덕목 중 하나로 꼽았다. 법치(法治)도 법이 없는 듯 법이 흐르는 사회, 법을 의식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다.
인터넷 대중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법의 존재가 개인에게 너무 뚜렷하게 부각됐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법이 바로 우리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저작권법 위반으로 사이버수사대에 불려간 네티즌은 그 경험자들이다. 이들은 예상치못한 국가 권력기관의 호출에 어쩔 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한다.
지난 20일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 ‘미네르바 사건’은 법이 개인 삶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미네르바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는 단지 네티즌이 많이 찾아오기 바라며, 격려를 받으면 기분이 우쭐해져 더 좋은 글을 올리고 싶고, 그러다가 가끔 오버센스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블로거일 뿐이다. 미처 준비 안 된 개인 앞에 아무런 완충지대 없이 법이 불쑥 나타나면 충격이 크다. 7월부터 발효되는 새 저작권법이나 개정을 앞두고 있는 정보통신망법은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 너무 직접적으로,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얼마 전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일본 도쿄 아다치구가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푸른색 가로등을 설치해 효과를 봤다는 내용이 나왔다. 밝고 경쾌한 푸른색 가로등을 설치한 이후 밤에 산책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전반적으로 지역에 활기가 생겨 이후 범죄가 단 한 건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범죄자를 잡기 위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처벌수위를 높이는 방법만을 썼더라면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푸른 가로등은 법의 취지가 일반인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 또 다른 모습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 네티즌에게 법이 주먹보다 가깝다. 좀 멀찍이 떨어뜨려 주거나 푸른 가로등과 같은 완충지대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사는 게 너무 피곤할지도 모른다.
조인혜 전자신문 미래기술연구센터 팀장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