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위기 다음을 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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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서니 퀸 주연의 ‘바렌’이란 영화가 있다. 이누이트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백인이 깨진 얼음호수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동료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누이트는 만류한다. 동료를 구하려다 함께 죽게 된다고. 이를 뿌리치고 백인들은 얼음물에 팔을 담가 동료를 건져낸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물 밖에 나온 동료는 바로 얼어 죽고 만다. 익사는 면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하 수십도의 기온에서 동사는 피할 수 없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물에 팔을 담갔던 나머지 사람들도 얼어붙기 시작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지난해 12월부터는 각국 정부가 나라 대표 제조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GM과 크라이슬러에 총 174억달러(약 22조5330억원)의 지원을 결정했다. 유럽국가 정부도 자국의 자동차업계 지원을 경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메모리 제조 분야에선 대만과 독일이 정부 지원을 확정했다. 대만 경제부는 위기에 빠진 자국의 D램 산업을 돕기 위해 2000억대만달러(약 7조8560억원)의 정부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말 포르투갈 금융사와 함께 키몬다에 3억2500만유로(약 5700억원)의 긴급금융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나중에 동사하더라도 우선 익사 직전에 있는 기업들을 먼저 구해놓고 보자는 정부의 다급한 판단의 결과다.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지금의 상황이 시계 제로의 폭풍설이 몰아치는 영하 수십도의 상황까진 악화되지 않은지라 정부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는 기업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살아난 그 다음이다. 정부의 직접적 금융지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2002년과 2003년 하이닉스반도체 사례를 통해서다. 당시 미국, 독일, 일본 등의 D램 업체는 채권단의 하이닉스반도체 금융지원 사실을 놓고 불공정 금융지원 행위라며 상계관세 부과 결정을 얻어낸 바 있다. 최종 결론은 무혐의로 내려졌지만 결백을 밝히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5년. 돈도 돈이지만 마음고생과 명예회복에 걸린 시간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나라 밖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들처럼 우리도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우리만 법·규정 지키며 샌님처럼 앉아 있다 당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섞였다. 편협한 시각이다. 기왕지사 이리 됐으니 진흙탕에 함께 뛰어들자는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직접 지원은 명백한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이다. 정부의 직접 지원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후의 카드로 써야 한다. 최후의 카드인 이유는 반드시 거둔 효과 이상의 후유증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으로 부상한 일본의 대응방식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 분야 최대 경쟁국가인 미국처럼 우리도 자동차 업계를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 직접 지원에 신중하라는 주문이 대부분이다. 자국기업 우선주의에 입각한 불공정 지원은 부실기업의 퇴출을 지연시켜 궁극적으로 산업 전체에 피해는 물론이고 세금을 부담하는 국민에게도 피해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지당한 얘기다. 우리 업계도 정부의 직접 지원은 기대하지 말자. 기사회생 후 부메랑을 맞을 것인지, 위험 극복 후 기회를 맞을 것인지 따져보자. 이번 위기에서 제발 건강하게 살아남아라. 그리고 훗날 탈법자를 반드시 응징하자. 그것도 떳떳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최정훈 국제부 차장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