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유럽 출장 길에 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브뤼셀에서 주최하는 ‘이노베이션 데이’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우리 말로 하면 ‘혁신의 날’ 정도로 해석되는 이 행사는 미래 디지털 기술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IT업계에 건전한 생태계를 뿌리내리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며 협력사와 공동 개발한 혁신적 기술도 소개된다.
이날 행사장에는 혁신을 위한 필수조건에 대한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여러 주장 속에서도 공통된 의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롭다고 무조건 혁신이 아니라 과거와 연장선상에서 다양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것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표적으로 제시된 사례가 디지털 문서 표준이었다. 흥미롭게 논의를 지켜보며 지난해 봤던 언론 보도가 떠올랐다. 조선왕조실록 얘기다. 실록 일부는 최근까지 보존처리조차 불투명한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보존을 위해 바른 밀랍이 종이에 들러붙어 균열이 생기고 변색과 함께 얼룩이 생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복원에 필수적인 밀랍의 성분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던 것. 다행히 오랜 연구 끝에 지난해 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프랑스 고문서 보존 전문가들과 협력해 밀랍본의 성분과 제작 방법, 노화 메커니즘을 일부 규명하는 데 성공하며 복원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조만간 복원된 실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었다.
디지털 기술 덕택에 후세는 지금 우리가 쓰고 저장하는 문서를 파악하고 보존하느라 이 같은 수고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보기록 수단이 세월의 무게를 뛰어넘을 수 있는 디지털 문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 종이에 의지해 왔던 우리는 디지털 문서 덕택에 정보전달 속도나 문서작성 효율이 향상됐다. 손상 없는 장기 보존 가능성과 공간 효율성으로 기업이나 정부에서도 중요한 문서 보존은 디지털화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문서가 보편화되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컴퓨터 플랫폼이나 애플리케이션 환경이 달라서 문서를 열 수 없거나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사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두된 것이 ‘호환성’ 있는 문서규격의 표준이다.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종이 규격인 A4 사이즈가 제조회사에 관계없이 모든 프린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전자문서 형식도 국제표준을 두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이미 문서뿐만 아니라 디지털 콘텐츠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규격에는 다양한 표준이 존재하고 있다. 이미지 저장 표준만 하더라도 간편한 대신 해상도는 떨어지는 JPG파일과 용량은 크지만 세밀한 PNG파일 등 다수가 있다. 활용도에 따라 선택해 쓸 수 있도록 복수의 표준이 존재하는 것이다. 디지털 문서 형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디지털 문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기록을 보존하는 데는 다양한 사용자 환경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체국에 ‘엽서’라는 한 가지 규격만 수용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장 업무처리는 편하겠지만 긴 글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나 애인에게 은밀한 밀어를 담아 보내고 싶은 사람은 우체국 이용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복수의 편지봉투 규격은 이처럼 다양한 시장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미 다양한 문서 형식이 시장에서 ‘사실상 표준’ 역할을 하며 각자의 장점에 맞게 선택돼 사용되는 것도 이 같은 시장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디지털 문서에는 더욱 중요한 임무가 있다. 바로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이다. 전 세계 사용자가 과거에 작성한 수천억개에 달하는 디지털 문서 모두를 앞으로도 계속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디지털 문서형식 표준이 결코 가볍게 다뤄질 수 없는 이유다.
이미 만들어진 문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표준은 조선왕조실록에 덧칠된, 알 수 없는 밀랍의 비밀처럼 향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과거와 소통이 단절된다면 ‘기록과 전달’이라는 문서로서의 고유 기능이 퇴색돼 버리는 셈이다. 디지털 문서형식의 벽을 허무는 표준화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표준규격을 너무 엄격하게 정하면 사용자 선택의 폭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 표준화의 혜택을 받는 사용자 스스로에게 여러 선택사항을 제시하고 필요로 하는 규격을 채택하는 방법이 바람직하다. 정보화 사회에서 혁신은 다양성을 수용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재성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사장 jaesungy@micro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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