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어느 강남 아줌마의 사연

 “어느날 집에 들어와 보니 전기가 끊겼더라고요. 방바닥은 냉골이고 아이들은 촛불을 켜둔 채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저녁도 굶은 채…. 뭐라 말도 안 나오고 속으로 눈물이 빗물처럼 흘려내렸습니다. 하지만 겉으론 태연했죠. 아이들에게 차마 눈물을 보일 순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무너지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고….”

 10년 전 이맘때쯤 뉴스의 상당수는 구조조정·실업·주가하락·이로 인한 비관자살이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외환위기(IMF) 한파는 나라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사업가에서 범법자로, 직장인에서 실업자로, 가정에서 거리로 내몰렸다. 그중의 한 명이 이 사장이다. 그녀는 현재 매출 500억원을 바라보는 중견기업의 사장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뼈저리게 IMF를 넘어야 했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이 사장의 남편은 잘나가는 군납업체 사장이었다. IMF 당시 대형 프로젝트를 맡아 거대 자금을 투자했다. 상당수 친인척의 돈도 끌어당겨 썼다. 하지만 IMF로 국방부의 프로젝트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언제 다시 재기될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 뿐이었다. 물거품이 되고 투자한 돈은 졸지에 허공에 사라지고 말았다. 생각할 수도 없는 어머어마한 돈이 하루아침에 없어진 것이다. 강남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에서 몸 누일 방 한 칸 없는 알거지가 됐다.

 집과 가재도구는 모두 차압당했다. 전기세가 밀려 전기마저 끊어지고 한 끼를 때울 끼니거리가 없었다. 촛불로 밤을 밝혀야 하는 생활이었다. 아이들은 8학군의 학교를 다니면서 급식비를 못 내 점심을 굶어야 했다. 결국 인근의 비닐하우스로 쫓겨난 이 사장은 재기를 다짐한다. 극에서 극으로 떨어진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잠시 힘든 것뿐”이라고만 말했다.

 고단한 그녀의 생활은 시작됐다. ‘나는 더 이상 주부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 이후 사업가로서 이 사장의 생활은 험로 그 자체였다. ‘비 오면 우산 뺐는다’는 은행의 관행도 경험했고 높다는 대기업의 벽도 실감했다. 좌절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업은 죽기 살기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되는 사업(死業)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선택한 사업은 IT업종이다. 주부로서 불편함을 느끼던 것을 찾아 사업화했다. 한 번 경험한 터라 IT버블이 넘쳐날 때도 현혹되지 않고 한길만 걸었다. ‘먹고 튀는’ 벤처사기극을 보면서 오히려 더 마음을 다잡고 사업에만 매진했다. 지금은 중동과 일본에서 수출 물량이 밀리고 있다. 작년에 500억원, 올해는 1000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 암울했던 시절 그녀를 촛불만큼의 빛에서 환한 전기불빛으로 끌어낸 것은 IT였다.

 잠시 꺼놓았던 기억의 스위치를 켜보자. 지금은 웃으면서 ‘그때’를 이야기한다. 세계 수출 10위권을 자랑하던 나라가 설마 무너지겠느냐는 막연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도 기억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부러울 게 없었던 강남 아줌마의 비닐하우스 ‘곡절’도 듣기에 따라 한낱 회상에 불과하다. IMF 파고를 IT로 넘었다는 사실도 잊은 지 오래다. 심지어 IT는 한물 갔다느니 벤처비리의 온상이니 하며 폄훼한다.

 기자를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지난 10년은 소설이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IMF가 국민에게 소설 같은 경험을 제공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되기도 했다. 삶에 대한 강인함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시작해 다시 정상에 올라서는 쾌감도 주었다. 산업의 흐름을 똑똑히 보여주었고 세상이 IT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했다. 그 주인공은 정부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다. 부러울 게 없던 강남 아줌마의 추락과 재기, 10년 전 골방에서 IT신화를 일궈냈던 지금의 우리다. 그래서 IMF의 경험과 IT산업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경우기자@전자신문, kw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