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우리나라 금융규제 당국의 수장인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이 12일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 주최로 열린 서울국제금융콘퍼런스에서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이명박 서울시장 등 국내외 유명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으로, 개도국이 하면 국수주의적이라고 무시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려다 말았다.
얘기인즉슨, 이날 오후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줄리아니 전 시장에 이어 세 번째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었던 윤 위원장의 한글판 연설원고 보도자료에는 이 같은 문구가 있었지만, 정작 이날 행한 영어 연설원고에서는 빠졌다는 것이다.
최근 연 이은 국내 부실기업 매각과정에서 외국계 자본의 배만 채워줬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그의 강력한 메시지는 외국계 자본 규제 시 다른 나라 눈치를 보기보다는 우리만의 특수성을 고려한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로서 기대되는 바였다.
사실 그동안 우리 금융당국은 소버린·론스타·헤르메스 등 외국계 자본이 잇달아 우리나라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해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면서 안팎의 많은 비난에 시달렸다. 국부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이를 규제하려 하면 해외 정부와 언론에서 과대규제 운운하는 항의가 쏟아지는 등 업무수행에 적잖은 제약이 뒤따랐다.
더욱이 이날 행사는 그간 국내 금융당국의 규제정책에 직간접적인 우려를 표명했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주최했다는 점에서 편향적인 외국 언론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윤 위원장의 실제 연설은 “외국인 투자자가 우리 정책에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희망한다”는 원론적인 수준으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오후 들어 공보실에서 ‘로맨스’ ‘스캔들’ 문구가 삭제된 한글판 원고자료를 다시 배포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애초 영문원고와 달리 한글원고는 마지막 수정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했다는 설명이지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스캔들’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경제과학부 이호준기자@전자신문, newle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