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뻔뻔한 딕&제인

 짐 캐리가 등장하면, 다른 모든 것은 빛을 잃는다. 짐 캐리표 영화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얼굴 근육의 다양한 변화를 통한 코믹 연기를 버리고 심각한 표정의 악당으로 등장하는 ‘레모니 스니캣의 위험한 대결’이나 가슴 아픈 멜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터널 손샤인’까지도 그렇다.

조지 시걸과 제인 폰다가 주연을 맡은 같은 제목의 1977년작을 리메이크 한 이 작품은 짐 캐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 중의 하나를 보여준다. 이 영화 속의 딕은 정말 짐 캐리답다. 선인과 악인을 수시로 넘나드는 그의 환상적인 연기는 적어도 이런 가벼운 코미디를 싫어하는 관객들마저도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선 영화는 거대 조직과 맞서 싸우는 왜소한 개인들의 억울함,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한을 풀어주는 내용 자체가 현실과 크게 밀착되어 있지는 않다. 팬터지가 개입된 내러티브 전개, 특히 결말부의 해피엔딩은 여전히 이런 류의 코미디 영화가 갖는 한계지만, 회사 자산을 몰래 빼돌리고 고의부도를 낸 회장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바쳤던 수천명의 임직원들은 실업자가 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미국이나 우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기저기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 영화는 비리 기업가에 대한 보편적인 공분을 팬터지를 삽입해 시원하게 대리만족 시켜준다. 그러므로 대기업의 홍보 담당 이사로 승진하자마자 터진 회사의 고의부도로 실업자가 된 딕 하퍼(짐 캐리 분)와 그의 아내 제인(티아 레오니 분)이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투쟁하는 모습들은 웃음 속에 울음이 담겨 질 수 밖에 없다. 그 상처받고 망가진 모습, 나중에는 은행털이까지 시도하는 딕과 제인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작품은 만화다. 왜냐면 치밀한 서사구조와 살아있는 캐릭터로 전개되는 영화가 아니라, 논리를 벗어난 비이성적 내러티브 전개, 황당무계하고 보편타당하지 않는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5년동안 열심히 일한 직장에서 드디어 인정을 받아 홍보담당 이사로 승진한 딕 하퍼에게 세상은 모두 내 것처럼 느껴진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 제인에게 당장 회사 때려치우라고 한다. 임원이 되면 월급 수준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고생 끝인 것이다. 그러나 생방송에 출연한 딕은 홍보 담당이사인 자신도 모르게 회사의 주식이 회장(알렉 볼드윈 분)에 의해 몰래 빼돌려지고 회사가 파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할부로 들여 놓았던 차, 심지어 집 마당에 깔아 놓은 잔디까지 채권자들에게 다 빼앗긴 딕과 제인은 재취업을 시도해 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드디어 그들은 슈퍼마켓이나 은행까지 털려고 한다.

이 영화가 실패한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날카로운 사회풍자를 전혀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짐 캐리표 트레이드 마크를 내세워 그냥 얄팍한 코미디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비리 기업주에 의해 희생당하는 평범한 샐러리맨들, 직장 잃고 돈이 없어지자 하나 둘씩 떠나는 친구들, 이런 모습들은 그러나 가슴 아프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풍자의 날을 세워 얼룩진 세상의 단면을 섬찟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지만, 오히려 팬터지처럼 비이성적 방법으로 접근하면서 순간적이며 감각적인 웃음만 주려고 노력한다. 짐 캐리 개인기에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관객이라면 극장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나 같으면 이런 영화는 휴일 오후 집 안에서 비디오를 보는 쪽을 선택하겠다.

<영화 평론가 · 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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