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해외진출의 꿈을 이루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안 된다는 생각 대신 더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하늘도 우리를 돕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여의도와 잠실 등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아파트 건설 붐은 우리 회사의 급성장을 이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도에 처음 들어선 한양아파트와 은하아파트의 인터폰 설치를 시작으로 각 건설업체의 인터폰 설치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아파트 건설 호황은 50여만개의 인터폰 수요를 창출했는데 그중 우리 회사가 90% 이상을 공급하게 됐다. 주문 쇄도로 매달 생산직 사원을 증원하고도 24시간을 풀가동했지만 그 수요를 따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향후 수년간은 국내 수요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회사는 안정궤도에 올랐다.
그즈음 나는 다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바다 건너 세계가 나의 혈기를 일깨웠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어마어마한 큰 시장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때마침 정부 역시 가발 섬유 등 소수 품목에 한정돼 있던 수출 대상을 확장하고자 적극적인 해외수출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한 터였다. 1973년 8월 마침내 미국과 영국으로의 첫 수출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해 10월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고유가 여파는 국내 수많은 기업을 강타했다. 비록 우리 회사가 직접적인 영향권에 휩쓸리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오일 쇼크는 위기 관리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로 다가왔다.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석유 파동과 같은 위기는 언제 다시 올지 모릅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수출뿐입니다. 수출을 위해서는 제품의 질이 우수해야 합니다. 생산직 여러분은 좋은 물건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수출은 내가 맡겠습니다.”
현재 100여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코맥스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기업 중 하나다. 지금도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노력은 쉼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두 차례의 오일 쇼크와 IMF 외환위기 등을 위시한 크고 작은 위기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던 힘은 이러한 해외 수출 시장 확보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작 당시에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국내에서는 선발주자로서 업계의 우위를 다지고 있었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개발도상국의 이름 없는 작은 기업에 불과했다. 최선의 방법은 직접 몸으로 부딪혀 판로를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1973년 가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전자전람회는 내게 자신감과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10여가지의 제품을 가지고 전시회에 참석했던 나는 어렵사리 ‘레카톤’이라는 큰 회사와 미팅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비록 서툰 영어였지만 샘플을 보여주며 우리 회사와 제품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고 아울러 최선을 다해 계약 이행에 임하겠다는 간곡한 의지를 내비쳤다.
‘레카톤’의 사장은 기대 이상의 품질과 저렴한 가격에 호감을 보였고 그 자리에서 3만달러의 계약이 성사됐다.
“당신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에 신뢰가 갑니다. 당신을 믿고 수입하겠으니 잘해 봅시다.”
현재 코맥스의 수출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전세계 국경을 넘나드는 지역 다변화와 현지문화 적응을 통한 다각화, 국내외 시장을 통합하는 다각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 아래 수출초기에는 1000∼2000달러의 소량 주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의 글로벌 기업 코맥스는 이렇듯 세계 구석구석까지 파고들 제품 그 하나하나에 ‘Made In Korea’를 찍어낼 때의 긍지와 자부심과 함께 시작됐다.
bbduk@commax.co.kr
필자가 2003년 10월 중동 최대 가전유통업체인 아델일렉트로닉스 센터와 중동지역 비디오도어폰 판매 관련 총판 제휴를 맺고 있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