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이다. 당신이 국가에 낸 돈을 한 푼이라도 누가 멋대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도 다수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해에 따라 용처를 달리한다면 가만히 있겠는가. 사람에 따라 각기 대응이 다를 것이다. 일부는 참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를 꿀꺽 삼키는 이도 마음까지 편하지는 아닐 것이다.
왜 이런 가설을 하는가. 지금 국회에서 내년 예산안 심의가 한창 진행중인 까닭이다. 주말도 쉬지 않고 심의하겠다고 한다. 정쟁이 가져온 자업자득이니 국회의원들이 국민한테 생색낼 일은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정부 예산이란 게 국민, 바로 내가 낸 돈이다. 그 돈의 내년 사용처와 규모를 따져 보는 게 예산심의다. 그러니 너나 할 것 없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내년 예산은 208조원 규모다. 올해 196조원보다 12조원이 늘어났다.
하지만 벌써부터 이상징후가 나타나 걱정이다. ‘졸속심의’와 ‘선심성 예산 끼워넣기’의 구태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물론 선량들은 “천부당 만부당 하다”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한 초선의원의 자괴심이 담긴 글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 초선의원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2005년 예산(안) 심의 흉내내기’란 글에서 ‘무늬뿐인 예산안 심의’라며 해당 상위의 예산심의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상위에서 2조여원의 예산 심의가 하루 반나절 만에 얼렁뚱땅 끝났다. 그 시간에 예산의 용처를 정하고 용도별 금액을 결정했다면 누가 정상적인 예산심의라고 믿겠느냐”면서 “이런 식이라면 예산심의가 아니라 예산 심의 흉내내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졸속 심의와 예산 늑장처리의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며 예산심의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건주의 심리로 이것 저것 졸속으로 바꾸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관행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받아들이기에는 예산심의가 갖는 의미가 너무나 크다”며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예산이 적재적소에 제대로 쓰이면 나라가 윤택해진다. 정부가 역점을 두는 IT뉴딜이나 기술입국건설, 수출확대, 취업난 해소, 벤처육성 등도 성공리에 추진할 수 있다. 하지만 가야 할 곳에 예산이 가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될 리 없다. 헛돈 쓰는 셈이다.
나라의 미래가 담긴 예산심의다. 지금이 어느 땐가. 수출여건은 나빠지고 고유가, 원자재난, 노사대립 등 난제가 쌓여 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국회 상임위를 거치면서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보다 벌써 4조원이 늘어났다고 한다. 의원들의 지역구 챙기기에 따른 선심성 예산이라고 한다. 국회의원이 자기 주머니에서 낼 돈이라면 얼마를 부풀려도 관여할 바 아니다. 그게 아니니 문제다. 이러니 “국회의원이 만지면 늘어나는 건 예산뿐”이라는 비아냥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정주부도 남편이 월급을 받아오면 그 달 지출 계획을 세운다. 고정으로 내야 하는 전기세, 수도세, 교육비 등에서 한 푼이라도 아낄 게 없나 해서 몇 번씩 계산기를 두드린다. 단돈 100원이라도 차이가 나면 이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쓴다. 이게 서민의 생활상이다.
그런데 나라 한해, 그것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다루는 일을 ‘처삼촌 뫼 벌초하는 식’으로 건성건성 해서야 되겠는가. 주부의 세심함으로 예산의 용처를 따지고 선심성 끼워넣기를 막아야 한다. 철저한 예산안 심의는 선량의 기본 책무다.
<이현덕 논설주간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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