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너울` 벗고 다시 초심으로

 미당(未堂) 서정주의 말대로 초록이 지쳐 온통 단풍이 든 가로수들이 겨울비 마냥 추절추절 거리를 적신다. 입동이 지나서인 지 하마 겨울의 문턱 안 깊숙이 성큼 들어선 느낌이다. 아침 저녁으로 내뱉는 동장군의 날숨에서 예사롭지 않는 냉기까지 느껴져 마음이 더욱 스산해진다.

 요즘 단풍은 옛날의 그 것처럼 때깔 곱거나 윤기가 흐르지 않는다. 사춘기 소년소녀가 아니라도 곱게 물든 낙엽을 보면 한 두 개쯤 주워 책갈피에 끼워두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선 그런 단풍잎을 찾기 힘들다. 우중충한 빛깔의 조락한 단풍은 마치 몹쓸 바람에 거리로 내몰린 명퇴자의 우울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피기도 전에 시든 꽃처럼, 푸름이 채 가시지 않은 낙엽을 보면 공연히 콧마루가 시큰거린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누더기 차림에 찬비를 맞아야 하는 이 을씨년스런 시절에.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걸신처럼, 우리에겐 한때 주체할 수 없는 식탐에 빠졌던 불쾌한 추억이 있다. 한탕주의로 채워진 배를 두드리며 나른한 환상에 젖어 있던 우리를 흔들어 깨운 건 불행하게도 IMF였다. 그때의 충격으로 우리는 휘청거렸다. 그리고 우리가 왜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해 참회했다. 사회 곳곳에 잠복해 있던 거품바이러스의 실체가 드러나자 기업들은 몸피를 줄이고 체질 강화를 위해 자구 처방을 내놓았다. 정부에서도 일자리 창출을 위해 벤처 육성자금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술 개발은 뒷전인 채 ‘머니게임’에 열중했던 무늬만 벤처였던 벤처들이 발행한 주식예탁서 휴지조각 하나 달랑 손에 들고 있을 뿐이다.

 요즘 사업하는 이들은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있다. IMF 때엔 그래도 전투 의욕만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만성무력증에 빠져 있으니 사업할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 불러도 청중이 없으면 신명이 나지 않는 것처럼 상대할 파트너가 없으니 이거야말로 정말 큰일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경기가 바닥을 쳤고 서서히 경제가 회복될 거라는 낙관론들이 매스컴을 통해 나돌지만 사업하는 이들에겐 한낱 양치기목동의 넋두리로 들릴 뿐이다.

 경제가 불투명하니 투자하기 두렵고, 첩첩산중에 진퇴양난이고 강을 건너니 산이 가로막는 형국이다. 기술체질 강화는 뒷전이고 벤처배팅 한탕주의에 탐닉했던 것에 대한 자업자득인 셈이다. ‘아메리칸 뷰티’라는 영화에 나오는, 인간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상징화한 검은색 비닐봉지는, 욕망의 거리에서 어쩌지도 못 한 채 배회하는 우리들의 ‘검은 복면’인지도 모른다.

 시인 윤제림은 ‘가벼운 안녕’이라는 시에서 불확실성의 새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잘 것 없는 검은 비닐 봉지를 통해 우화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제 가는 길이 맞느냐 묻고 싶은 듯/길 복판에 멈춰 섰다가,/아주 가기는 싫은 듯 은행잎 단풍잎과 함께/차에도 밟혔다가 구둣발에도 눌렸다가,/아무나 붙잡고 달려보다가/엎어졌다가, 뒹굴다가/납작해졌다가, 봉긋해졌다가/집 나온 강아지모양 쭈뼛거리다가/ 부르르르 떨다가/결심한 듯 차고 일어나는/검은 비닐 봉다리./가벼운 안녕.

 넘쳐나는 탐욕의 넋두리로 사회가 혼란스럽다. 이젠 진정, 모든 껍데기와 너울을 벗고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갈 때다. 그래야 나라가 살고 경제가 살고 우리가 살고 나도 산다.

 yb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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