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던 삼성전자가 86년 1MD램에 이어 92년 64MD램을 세계 첫 개발하면서 메모리 선도 기업으로 두각을 나타낼 즈음 나는 회사의 앞날을 가름할 중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성장성은 떨어지지만 안정적인 매출과 이익을 보장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만을 취급해 온 우리에게 93년 말 PC산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사건이 터졌다. PC운영 체제가 도스(DOS)에서 윈도 환경으로 바뀌며 고용량 펜티엄 PC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비메모리와 함께 메모리 반도체도 취급해야 했지만 메모리값은 끓는 냄비처럼 가격 변화가 심했고 대규모 유동 자금이 투입되어야 했기에 이를 새로운 전략 사업으로 삼을지 결단내리기가 어려웠다. 일부 삼성 대리점은 경기에 메모리판매를 민감한 ‘투기 사업’으로 보고 아예 취급을 포기했다.
그러나 삼성의 반도체 전략이 메모리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감지한 나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메모리 판매에 뛰어들었고 세계 전자 경기의 호조에 힘입어 95·96년 처음으로 연 10억원 대의 순이익을 올리며 중견 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우리 회사가 국내 메모리 유통 1위 기업으로 우뚝 서는데 견인역을 톡톡히 해준 거래처로 세진컴퓨터를 빼 놓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파산했지만 세진은 부산에서 5명 규모의 PC조립 업체로 출발해 대전을 거쳐 95년 서울에 입성할 때까지 당시 PC유통 시장에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파장을 주었을 정도였다.
전체 매출 중 10% 이상을 광고비로 지출하면서 세진은 단기간에 삼성전자·삼보컴퓨터에 이은 ‘PC업계 강자’로 떠올랐다. 우리 회사에게도 세진이 전체 매출액의 30∼50%를 차지하는 절대적 거래처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급하게 이룬 모래성이라 그랬을까! 여기저기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도한 사업 확장과 채산성 악화로 ‘세진 부도설’이 끊임없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거래 은행에서 거래를 만류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
이런 주변의 우려에도 우리는 여신 기간을 대폭 줄이면서 세진에 반도체를 계속 공급해 주었다. 언제 부도날 지도 모를 회사와 거래를 계속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참으로 무모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우통신이 수천억원대의 세진 채권을 갖고 있었고 유통망 확보를 통해 데스크톱 PC분야로 사업 확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세진이 쉽사리 부도나지 않을 것으로 봤다.
내 예상대로 95년 11월 드디어 대우통신이 51%의 지분을 확보하면서 세진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로 회사 설립자인 한상수 사장의 퇴진때까지 거래는 지속됐다. 이는 또 다른 PC업체와 거래를 틀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결국 삼보컴퓨터·현주·세이퍼컴퓨터와 주연테크 등 국내 중견 PC업체가 모두 우리 회사의 고객이 되었다. peter@withi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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