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의 처음이 그렇겠지만 음성·FAX 관련 솔루션을 시작한 예스테크놀로지의 시작은 말 그대로 황량한 들판에 한 톨의 씨앗을 뿌리는 심정이었다. 콜센터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그 때 컴퓨터통신통합(CTI)이라는 장르에 도전장을 냈기 때문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적극 만류했음은 물론이다.
우리회사가 이제 그나마 자리를 잡은 기업으로 불린다면 이는 그 동안 겪은 많은 어려움과 선택의 기로에서 삼킨 고민에 대한 작은 인사를 받은 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차 독립해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각오가 한창이던 35살 때이던 1994년 예스테크놀로지를 설립할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동양정밀에 근무하면서 음성 및 FAX 관련 솔루션 사업을 접하게 됐다. 담당했던 업무는 미주 지역으로 키폰 및 VMS(Voice Message System)를 OEM방식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는데 이 기술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휴대폰 사업자는 물론 당시 삐삐 사업자들로부터의 요구가 급증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아직 국내에서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지만 수출되는 장비를 눈여겨 보니 조만간 내수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경영진에 제안도 했었지만 결국은 그 해 11월 책상 하나의 작은 사무실에서 5000만원 전 재산을 털어 사장이라는 명함을 만들고 말았다.
사업 초기 시장 판로 개척이나 연구 개발 분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탓에 사업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었다. 특히 대내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인간관계가 중시되는 영업에서 경험이 전혀 없었던 당시의 어려움은 그나마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스테크놀로지라는 회사의 이름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가. 바닥나는 자금은 어찌할 것인가. 또 개발인력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뚜렷한 해답은 없었다. 그저 작은 업체의 기민한 동작을 활용해 적기 납품, 발 빠른 고객 요구 사항 대처 등으로 승부해보는 길 밖에.
초기 창업 멤버들과 낮에는 외부에서 고객을 찾고 밤에는 좁은 사무실에서 제품 개발을 하며 1년을 보냈다. 우편함에 갖가지 비용청구서만 쌓이고 여전히 이렇다할 매출은 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머릿속에는 다만 ‘너무 빨랐던 것일까’하는 생각만 스며들었다.
그러던 95년 어느 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벼랑 끝에 선 예스테크놀로지에게 첫 매출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금의 어떤 대형 프로젝트 딜의 성사라도 그때의 기쁨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해의 첫 프로젝트를 마치고 예스테크놀로지의 작은 가족들은 그렇게 1년만의 첫나들이를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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