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28일, 세계 유일의 DVD 규격 단체인 DVD포럼의 간사회를 하루 앞두고 파리 시내 한 호텔에서 도시바와 필립스의 담당자가 만났다.
두사람은 대용량광디스크 양대 진영인 ‘AOD’와 ‘블루레이’의 대표자다. 소니는 포럼 회원 자격으로 참석해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의제는 도시바·NEC가 내놓은 ‘AOD’를 DVD포럼의 차기 DVD로 인정하느냐 여부였다.
‘도시바·NEC 안을 표결에 부치면 (블루레이진영의 반대가 예상되기에) 사실상 DVD포럼이 깨진다. 내일 도시바·NEC 안을 투표없이 차세대DVD로 인정한다.’
협상은 결렬이 아닌 합의라는 모양새로 끝났다. 다음날 DVD포럼은 AOD를 차기 DVD표준으로 인정했다. 이에따라 소니가 이미 내놓은 ‘블루레이’와 도시바의 ‘AOD’간 규격경쟁이 시작됐다. 시작하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규격경쟁이다. 지난 역사에 기록된 ‘VHS 대 베타’ 규격경쟁에서 패한 아픔을 갖고 있는 소니는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니에는 안타깝지만 판세는 도시바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이 좋아 차세대DVD 규격경쟁이지, ‘블루레이’는 ‘차세대 DVD’란 단어를 쓸 수 없게 돼 있다. 포럼이 인정한 AOD만 ‘DVD’란 로고를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차세대DVD 규격경쟁이 아니라 ‘대용량광디스크 규격경쟁’이라야 옳다.
여기에 할리우드라는 암초까지 등장했다.
영화는 영상매체의 규격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콘텐츠다. 미국 영화산업이 어느편을 미느냐가 승패를 가름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실례로 95년 DVD규격경쟁에서 도시바와 제휴한 타임워너가 힘을 발휘, 할리우드가 일거에 도시바 지지로 돌아섰다. 이후 소니는 반년도 채 못버티고 투항했다.
바로 그 AOL타임워너가 제3의 규격이라며 ‘HD-DVD9’를 들고 나왔다. DVD9는 기존 DVD와 같은 적색레이저를 쓴다. 구조도 똑같다. 단지 압축기술의 진보에 따라 태어난 ‘DVD연장판’이다. AOD타임워너는 현 DVD방식이면서 저장용량이 많은 하드웨어를 보급시켜 돈을 버는 매체를 하나 더 늘리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DVD9는 소니에 눈엣가시”라고 한 전문가는 지적했다. DVD판 자체를 뒤엎고 새 블루레이 시대를 열어야하는데 자꾸만 ‘DVD판’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반면 도시바는 느긋하다. ‘AOD’는 현 DVD와 친화성이 높다. 도시바 디지털미디어네트워크 부문 야마다씨는 “DVD9 대응용 복합기의 상품화도 검토하고 있다”며 느긋함을 보인다.
게다가 AOL타임워너는 ‘블루레이 대 AOD’의 캐스팅보트까지 쥐고 있다. 주도권을 쥔 콘텐츠업계의 요구에 따라 하드웨어업계의 규격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니가 부지런히 할리우드를 다니고 있다는 소문은 충분한 나름대로의 이유와 근거를 갖고 있다. 특히 소니에는 소니픽처스엔터테인트가 있다. 4월 1일자 소니그룹인사에서 하워드 스트린거가 부회장자리에 올라섰다. 하워드는 바로 소니픽처스엔터테인먼트를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다. 소니는 할리우드가 블루레이를 지지한다는 선을 갈망하고 있다. <성호철기자 hcs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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