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새그림이 필요하다

 정부의 부실기업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서울은행에 이어 대한생명이 새 주인을 찾아 둥지를 틀게 됐다. 이젠 하이닉스 처리문제만 잘 매듭지으면 부실기업으로 인한 우리 경제의 투명성이 한층 밝아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특히 하이닉스 처리문제를 더이상 미루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 처리 방향을 둘러싸고 정부와 금융계, 그리고 학계와 업계가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한편에서는 외국기업에 매각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매각은 국부 유출이라며 독자생존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쪽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출자 전환을 하고도 6조원에 이르는 부채를 떠안고 있는 하이닉스는 분명히 부실덩어리다. 유동성 자금도 태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불확실한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 문제는 정부와 채권단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이냐는 점이다.

 정부 고위관계자의 얘기를 종합하면 외국기업에 매각하는 쪽으로 다시 가닥이 잡히는 것 같다. 채권단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대한 미련도 여전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내부 파열음도 만만치 않게 들려온다. 한쪽에서는 자구노력을 통해 매각하자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대로 몰아붙이자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근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하이닉스의 독자생존론은 국수주의적 발상”이라며 매각 반대론자들을 강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사실 상대방이 덥썩 받아주면 끝날 문제다. 그러나 기업을 청산하고 매각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산업적 여파가 큰 기업을 무 자르듯 해 그 기업의 사활을 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학계와 산업계는 하이닉스 매각으로 인한 산업 피폐를 가장 우려해왔다. 특히 학계는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 하이닉스의 매각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되고 말 것이라며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소액주주들은 더 나아가 국부유출이라고까지 매각론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쯤되면 절충이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사태를 지켜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마이크론은 이미 하이닉스를 살 여력을 상실했다. 마이크론은 지난 8월 말로 끝난 2002년 4분기 회계연도에서 4억6800만달러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면서 7분기 연속적자를 기록했다. 경쟁사인 삼성과의 격차도 더욱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내실을 다질 때지 경쟁사를 사들일 여유가 없다. 따라서 마이크론에 대한 미련을 빨리 내던져야 한다.

 그렇다고 하이닉스를 마냥 끌어안고 있을 수도 없다. 반도체 가격은 3분기 들어 연중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고 가격반등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하이디스 매각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이닉스로 인한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이 또다시 불거져서도 안된다.

 대화는 묘약이다. 지금처럼 하이닉스 문제가 얽히고 설킨 것은 상황 논리를 배제한 채 자기가 그린 그림만이 최선이라고 서로 고집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최근 D램 메이커를 1개사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히타치제작소의 D램 통합 회사인 엘피다가 미쓰비시를 집요하게 설득하고 조정한 결과다.

 하이닉스 처리문제를 놓고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밑그림을 다시 그려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상대를 국수주의자, 국부유출자로 몰아붙이고서는 진지한 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남은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 하지 않던가.

 <모인 산업기술부장 inm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