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아직도 `갑과 을`인가

 내수경기가 탄력을 받지 못한 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수출은 원화강세로 초비상이 걸렸다. 최대 수출처인 미국은 금융시장 불안으로 소비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현재의 추세라면 1100원선도 와해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러다가 올해 목표한 수출 1620억달러, 경제성장률 6.2% 달성도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원화강세가 이어지면 세트업체, 특히 환관리에 취약한 부품업체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내수마저 취약하다면 문을 닫아야 한다. 세트업체들은 그나마 숨을 돌릴 여유가 있지만 부품업계는 외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사실 세트업체와 부품업계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부품이 모여 비로소 세트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가 아닌 ‘갑’과 ‘을’이란 수직적 관계로 이어져 있다. 대등한 입장이 아닌 종속적 관계로 얽혀져 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이른바 대형 세트업체들이 올 상반기 천문학적인 매출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부품업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찌보면 형제이며 동지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인 것 같다. 어느 한 부품업체 사장은 “어렵더라도 차라리 수출선을 찾아 나서는 게 훨씬 속이 편하다”며 세트업체의 ‘횡포’를 털어놓기도 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양쪽의 매끄럽지 않은 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일본 세트업체의 경쟁력은 협력업체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그만큼 협력업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일본 세트업체의 납품을 위한 품질승인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한번 품질승인을 얻으면 정보제공·기술이전 ·공동개발사업 등 부품업체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지원을 펼친다. 그도 모자라면 지분투자 형태로 자금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한마디로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일본 산업계의 협력구조다. 그 때문인지 일본은 10여년의 경기불황에도 끄떡하지 않고 있다.

 흔히 부품업체들을 산업계의 잔디로 비유한다. 잔디의 뿌리가 깊으면 장마에도 물이 넘치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쓰러지되 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세트업체들은 숲의 큰나무로 은유된다. 큰 나무가 존재하지 않으면 숲을 이룰 수 없고 곤충들이 몰려들지 않아 식물들이 꽃을 피우지 못한다. 산업을 일궈 나가기 위해서는 큰 나무들과 잔디가 같이 호흡하며 성장해야 한다.

 좋은 제품을 선보이며 산업을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세트업체와 부품업체가 한몸이 돼야 한다. 채산성이 악화된다고 하여 한쪽에만 가격부담을 안긴다면 산업전망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같은 수급정책은 좋은 제품의 완성을 기대할 수 없고 종국에는 자신의 발등을 찍고 만다. 남의 불행이 결국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이솝의 ‘꿀벌과 신’의 우화는 그래서 세트업체와 부품업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트업체들의 고질적인 공급가 인하 압력이 원고의 틈을 비집고 이쪽저쪽에서 들려온다.

 한편에서 보면 경기가 그만큼 안좋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체질개선 및 원가절감의 노력은 뒤로 한 채 한쪽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밀레니엄 시대인 지금도 갑과 을의 관계인가.

 <모인 산업기술부장 inm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