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나노기술 현장을 찾아서>(15)스위스 연방공과대학(ET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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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나노기술취재의 마지막 여정으로 취리히 외곽에 위치한 스위스 연방공과대학(ETHZ:Swiss Federeal Institute of Technology Zurich)을 찾아갔다.

 취리히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자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현대식 대학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공과대학인 ETHZ는 특히 컴퓨터공학분야에서 세계수준을 자랑하는데 일찍이 IBM의 유럽연구소를 취리히로 유치하는데 주요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 대학에는 외부인의 구내출입을 막는 외벽이나 정문이 없다. 이처럼 개방적인 ETHZ의 학풍은 외국과학자들이 수시로 방문해서 공동연구를 수행하는데 매우 적합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ETHZ 물리학과의 클라우스 엔슬린 교수가 취재진을 맞이했다.

 그는 양자컴퓨터를 구현하는데 기초가 되는 나노구조물을 개발하는 연구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최근 이곳에서 집중하는 과제는 10∼20나노 크기의 미세구조(Quantum Dot:양자점) 안에 전자를 하나씩 가둬서 기억소자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우선 STM을 이용해서 금속표면을 미세하게 긁으면 공기 중에서 산화돼 동그란 구조물(양자점)을 형성한다. 그 양자점 내부에 가둔 개별 전자를 외부자기장을 이용해 스핀방향을 자유롭게 제어하는 단계에 이르면 양자컴퓨터의 기초소자로 활용할 수 있다.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을 합쳐서 새로운 양자컴퓨터 소자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본 연구그룹의 목표입니다. 그 중에서 양자점을 이용해서 큐빗(Qubit:양자컴퓨터의 정보단위)을 만드는 것이 핵심과제지요.”

 여기서부터 엔슬리 교수의 복잡난해한 양자물리학 강의가 시작됐다.

 큐빗이란 양자컴퓨터의 기초정보단위로 기존 컴퓨터에서 0과 1로 표시되는 비트와 같은 개념이다. 현재의 컴퓨터는 0과 1이라는 두 개의 숫자로 세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양자컴퓨터에서는 하나의 입자(큐빗)가 0과 1 모두를 표시할 수 있다.

 미시세계의 핵이나 전자들은 마치 음파나 빛처럼 입자덩어리와 파동의 성질 모두를 갖는 이상한 양자상태를 지닌다. 이러한 양자상태는 외부와 상호작용에 의해서 변하는데 양자컴퓨터는 양자가 확실히 구분되는 두가지 상태를 0과 1의 신호로 잡는다.

 그런데 양자가 지닌 파동성질은 도미솔 화음을 동시에 듣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중첩될 수 있다. 중첩되는 파동의 성질 때문에 동시에 0도 되고 1도 되는 것인데 이것이 양자컴퓨터가 빠른 이유다. 이처럼 두가지 신호를 동시에 나타내는 양자컴퓨터는 큐빗수가 높아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계산속도가 빨라져 현재 인간이 개발한 최고의 슈퍼컴퓨터로 수천년이 걸리는 연산도 단 몇 분만에 해치우는 실력을 과시한다.

 예를 들어 56비트로 된 암호를 무식하게 1부터 차례대로 대입할 때 1Mbps, 즉 1초에 백만개의 명령을 수행하는 고전 컴퓨터로 찾아내려면 약 300년이 걸리지만 똑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양자컴퓨터로는 4분이면 알아낼 수 있다. 정보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암호체계가 한꺼번에 뚫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반도체를 양자소재로 바꾸는 양자컴퓨터 개발에 강대국들의 관심이 급격히 커지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20년 안에 개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1994년 벨연구소의 쇼(Shor)가 발표한 소인수분해 풀이법으로 양자컴퓨터가 실제로 구현되면서 더욱 가속화되는 추세다.

 현재 양자컴퓨터 연구는 수십개의 나라들이 국가적 지원 하에 연구를 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인력과 연구비가 투자되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양자컴퓨터의 하드웨어로는 양자점·이온덫·초전도소자 등 여러가지의 양자계가 제안되고 있지만 향후 실용화될 양자컴퓨터에서 어떤 방식이 실용적인 CPU로서 최종 승자가 될 것인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현재 가장 발달된 양자컴퓨터는 핵자기공명(NMR)을 이용한 것으로 7비트의 처리능력을 지니고 있다. 핵자기공명 양자컴퓨터에서는 물같은 액체상태 분자의 핵을 비트로 사용한다. 

 “양자컴퓨터의 연산능력은 실로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기존 컴퓨터가 수류탄이라면 양자컴퓨터는 핵폭탄과 같은 위력이라고 보면 됩니다.”

 특히 모든 암호체계가 파괴돼 정보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기 때문에 주요 국가들이 전략기술로 개발하고 있지요. 그는 양자점을 이용한 스핀제어기술이 양자컴퓨터의 궁극적인 진화모습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이면 사람의 체질에 맞는 신약개발도 가능하지요.

 엔슬린 교수는 양자현상을 이용한 통신보안기술의 현황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양자통신기술은 해커의 공격을 막는 양자암호학에 기반하고 있는데 특히 가까운 시일 내에 실용화 가능성이 매우 높아 국내에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높다고 판단됐다.

 양자론의 중첩성질을 이용해 어떤 해커도 정보를 중간에서 빼가거나 암호를 깰 수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양자통신기술의 핵심인데 솔직히 모두다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물질의 양자특성을 이용하면 절대 도청이 불가능한 통신기술, 즉 하나의 광자정보를 실어서 암호화된 형태로 쏘아보내면 중간에서 해독이 불가능한 완벽한 통신보안체계가 탄생한다.

 미 국방부가 전략기술로 개발하고 있어 이러한 양자통신은 빠르면 수년 내에 상용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설명이다.

 특히 양자통신기술을 갖추지 못한 나라는 향후 일방적인 정보유출을 당할 것이라고 엔슬린교수는 경고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에 의심을 품었지요. 하지만 21세기는 양자역학의 시대입니다. 제가 개발하는 나노기술은 양자물리학을 구현하는 도구의 극히 일부에 해당합니다.”

 퀀텀컴퓨터와 양자통신기술에 대한 현란한 미래학강의를 듣고 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만약 1900년의 보통 사람들에게 향후 전기로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기계(TV), 사람보다 빠른 계산을 하는 기계(컴퓨터)가 나온다고 이야기하면 몇 명이나 믿었을까. 21세기 나노기술로 구현될 양자역학의 기술문명도 이렇게 나타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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