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이후 우리 경제가 지금껏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면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자생력 확보라는 과제일 것이다. 국가 경제의 ‘풀뿌리’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경제 주체지만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들의 위상이 초라하긴 마찬가지다. 정부도 범국가적 차원에서 중소기업 육성지원책을 펼친 지 오래지만 확실한 명약을 찾진 못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깨치고, 거듭나지 않는 한 각종 지원정책은 ‘물고기 잡는 법’ 대신 ‘물고기를 주는’ 꼴이었던 게 사실이다.
중소기업 발전 방안을 고민하던 중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게 된 계기는 지난 수년 전부터 불어닥친 전통산업의 e비즈니스화였다. 대기업에 비해 열악한 근무환경과 노후한 시설·설비는 결국 스스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악순환을 초래하기에 정보화와 경영혁신을 통해 자생력을 갖추자는 취지였다. 이때부터 정보화·e비즈니스화를 위한 정부 지원정책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중소기업청이 발벗고 나서고,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가 각종 육성책을 쏟아내며 ‘e중소기업’ 만들기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중소기업 정보화지원사업, 3만개 중소기업 IT화사업, 애플리케이션임대서비스(ASP) 보급확산사업, 협업적 IT화사업 등.
지원정책의 명칭과 방식은 달랐지만 정보화를 통한 중소기업 e비즈니스 저변 확대라는 목표는 공통적이었다. 여기에다 명목상 정보화가 주는 아니지만 신발산업 육성책, 유통산업 합리화, 섬유산업 활성화 등 업종별·지역별로 다양한 지원정책에 정보화는 약방의 감초처럼 포함됐다. 그러나 그 효과에 대해서는 중소기업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대의와 명분은 공감하지만 지원정책이 기업 현장에 내려가는 순간 예기치 못한 부작용과 또 다른 허점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본지와 한국전산원, 시장조사 전문기관 KRG는 기존 정보화 지원사업들의 현장평가를 통해 지속적인 보완책을 마련코자 ‘중소기업 정보화 지원정책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실시했다. 중소기업 현장의 요구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파악함으로써 향후 정부 지원사업의 개선 방향과 산업계 전반의 동참을 촉구하려는 취지에서다. 이번 조사 결과를 4개면에 걸쳐 상세히 소개한다.
◇조사 방법
전자신문사·한국전산원·KRG 3개 기관은 서울 구로공단 및 인천 남동공단 등 전국 주요 공단지역의 중소기업 212개를 선정해 지난 6일부터 23일까지 설문조사와 전화 인터뷰를 병행했다. 조사대상 가운데는 한국전산원과 KRG의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중소기업도 다수 포함됐다. 전체 응답기업은 총 212개였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지원사업에 참여한 업체는 절반을 조금 넘는 114개 업체에 불과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전체의 87%였고, 유통·서비스·건설·정보통신 분야가 나머지를 차지했다.
주된 조사 내용은 △정보화 인력·투자·애로사항·자기평가를 묻는 정보화 현황 △지원분야·참여목적·효과 등을 파악하기 위한 지원사업 참여현황 △지원사업의 만족도 및 활용도 △문제점 및 대정부 건의사항 등이다.
◇조사결과 개요
‘약간 불만스럽다’.
중소기업들이 정부 지원사업에 내린 다양한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기업들은 정부의 각종 정보화 지원사업이 아직은 현장의 실정에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대신 정부는 지원정책에 참여한 중소기업 수를 내세우는 데 만족하고 있다는 비판도 일부 제기됐다.
중소기업들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몇가지로 집약된다.
무엇보다 사후지원이 없다는 데 가장 불만이 컸다. 결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첨단 정보시스템을 도입하더라도 추후 실제 활용에 따른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정부의 지원 노력도 허사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획일적인 정보화 솔루션과 지원규모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중소기업들은 특히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기간시스템의 경우 업무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솔루션이 구축됨으로써 도입과정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다는 반응이 많았다. ERP는 상당부분 수정·보완작업이 불가피한데 보급형 제품으로는 이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밖에 일률적인 지원규모나 참여기업 선정과정에서의 평가 부족, 참여 신청에서 선정까지 번거로운 절차도 문제점으로 거론됐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들은 정부 지원정책이 보다 효과를 얻기 위해 사후지원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중소기업의 자금부담을 고려해 지원규모가 확대돼야 하고, 현황·수요에 대한 면밀한 사전조사와 지원결과에 대한 감리절차도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에서 중기청·산자부·정통부 등 각급 주무부처들이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정부 예산의 중복투자는 물론 단순히 지원대상 기업의 숫자만을 내세우는 식의 전시행정은 피해야 한다는 의미다. 중소기업 정보화 지원대상 기업을 양적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모범적인 선례를 만드는 데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응답기업들은 정부 차원에서도 종합적인 단일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중소기업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각종 유인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이번 조사에서 중소기업들이 체감하는 전반적인 정부 지원정책의 만족도는 2.72점(5점 만점)으로 기대 이하 수준이었다. 사후 활용도는 전체적으로 보통 수준이었다. 또 정부 지원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은 ERP 관련 시스템 비용 지원이 가장 많았고 기초정보 소프트웨어와 홈페이지 등이 뒤를 이었다.
◇조사대상 기업의 정보화 현황
212개 조사대상 기업들의 정보화 현황은 그동안 알려진 중소기업들의 실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올해 이들 기업이 책정한 IT투자예산은 지난해 매출 대비 평균 0.43%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다. 그나마 IT예산을 사전에 책정, 계획적으로 집행하는 기업 63개의 응답을 토대로 산출한 결과다. 나머지 상당수 업체들은 IT예산을 체계적으로 편성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 예산 집행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0.43%의 정보화예산은 조사대상 기업들이 대부분 제조업종에 속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동종의 대기업들(평균 0.59%)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한 형편이다. 0.59%라는 수치는 지난해 10월 본지를 비롯한 3개 기관이 200대 대기업을 상대로 IT예산을 도출한 결과다.
IT전문인력의 경우 전체 직원수 대비 평균 1.4%로 일반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역시 전체 212개 조사대상 기업 가운데 133곳만이 응답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 IT인력들은 IT업무만을 전담하기보다는 타 업무와 겸하는 사례가 많은데다, 상대적으로 대기업에 비해 외부 아웃소싱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드물어 인력구조의 취약성이 심각하다.
이번 조사대상 중소기업들은 정보화 추진의 애로점으로 비용부담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중복응답을 실시한 질문에서 정보화 비용부담이 52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정보화 전략부재(47건), 전문인력 부족(40건), 경영진 및 내부 직원들의 마인드 부족(38건), 중소기업용 보급형 솔루션 부족(38건) 등도 핵심적인 어려움이었다. 특히 비용부담 요인의 경우 기업 규모에 상관없이 큰 애로사항이었으며, 정보화전략 부재 문제는 기업 규모가 클수록 강하게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는 기업규모가 클수록 정보화 추진대상 업무범위가 넓어 상대적으로 체계적인 전략 수립이 필요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편 종업원수 100인 이상 기업들은 정보화 전담인력을 두는 사례가 많아 이로 인한 어려움은 덜한 편이었다.
기업 규모별로는 50인 이하 기업의 경우 62.9%가 인프라 구축단계, 28.6%가 단위업무 전산화와 내외부 정보교환단계라고 응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50인 이하 43개 업체가 답변한 결과다. 이에 따라 정보화 진화단계를 △인프라 구축 △단위업무 전산화 및 내외부 정보교환 △전사적 업무통합 △전자상거래(EC) 및 협업 등 4단계로 구분해 볼 때, 50인 이하 기업들은 대부분 초기단계에 머무르는 실정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100인 이상 기업들도 86%가 1, 2단계에 집중돼 중소기업이 전반적으로 정보화 수준이 취약한 실정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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