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타워]죽이려다 같이 살자니...

 역시 비즈니스의 세계였다.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이 오직 실리만이 존재하는 곳이 곧 비즈니스라는 것을 마이크론과 하이닉스가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최근 몇 개월 세계의 거의 모든 D램업체들이 시쳇말로 ‘찍어 내겠다’며 하이닉스를 물어뜯었는데 느닷없이 마이크론이 손을 잡겠다고 나섰다. 더구나 마이크론은 독일 인피니온과 함께 ‘하이닉스 때리기’ 내지 ‘하이닉스 죽이기’에서 선봉의 ‘맹장(?)’이었는데 이제는 같이 살자고 태도가 돌변했으니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마이크론이 하이닉스를 죽이는 것보다 더 큰 ‘그 무엇의 실리’를 찾아냈는지 궁금할 뿐이다.

 우선 마이크론이 그간의 전략, 즉 하이닉스 죽이기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노림수가 더이상 먹혀들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음직도 하다. 마이크론과 인피니온은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하이닉스를 지원하는 것은 특혜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바닥을 기는 D램 값 회복을 겨냥해 감산을 추진하려 했지만 하이닉스건 삼성전자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사건건 딴죽을 걸던 인피니온이 최근 독일 정부의 지원금을 받았는지에 대해 조사를 받는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오는 등 스타일만 구겼다. 이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며 인피니온을 조롱하고 있다. 이런 화살은 하이닉스를 공격하던 여타 외국기업들에까지 향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최근 업계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미소짖는 것은 엉뚱하게도 D램 시장의 절대강자 삼성전자라는 점이다.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하이닉스·마이크론·인피니온은 비록 부채의 차이는 있지만 천문학적인 영업적자에 허덕인다는 점에서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그래서 퇴출싸움도 더욱 절박하다. 반대로 삼성은 느긋하다. 후발주자들의 으르렁거림이 오히려 자신들의 시장지배력만 키워주고 있으니 굳이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다. 이런 사정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관계에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어차피 똑같이 피를 흘려가면서 누가 먼저 죽을지 시간과의 싸움에 돌입하던 D램업체들이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짝짓기가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훨씬 빠른 속도로 급가속되고 있는 점은 불안해 보인다. 양사의 제휴 발표가 있지마자 진념 부총리, 이근영 금감원장 등 정책당국자들이 화답이나 하듯 “연말께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론 협상팀도 곧바로 방한, 실사작업 중이다. 그래서 정부와 채권단·하이닉스가 이미 마이크론에 상당한 유인책을 제시, 사전 교감을 가졌다는 의문이 일고 있다.

 우리는 사정이 워낙 다급하던 IMF시절 ‘달러’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정부 재산과 기업의 해외매각을 서둘렀지만 이제는 그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다. 하이닉스 문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매각이건 지분교환이건 반드시 관철해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양보나 헐값 처분 혹은 고용불안이 재현돼서는 곤란하다. 기왕 가닥이 잡혔으면 연말이라는 시한 지키기보다는 얻어낼 실리가 중요하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미덥지 못한 정부가 나설수록 더욱 불안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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