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WTO와 미국의 ’힘’

◆이택 산업전자부장 etyt@etnews.co.kr

9·11 뉴욕 테러사건이 터졌을 때 몇몇 동료 언론인들과 미국 연수중이던 기자는 원인과 이유에 대한 현지 교수들과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테러리스트들의 만행에 충격과 분노를 느꼈던 것은 미국인들과 동양에서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인류의 보편적 정서를 공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테러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동등한 조건으로 맞상대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극단적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말에 미국인들이 보여준 반응은 놀라웠다. 백인 교수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인류를 상대로 한 범죄 행위를 합리화, 정당화한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예기치 않은 사태 전개에 ‘진의’를 설명했지만 아마도 당시의 미국인들은 ‘위대한 미국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미국 테러사태 현장에서 본 것은 ‘위대한 미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똘똘 뭉치는 단결력이었다. 인종 전시장으로 불릴 만큼 잡다한 민족이 들어와 있고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하는 나라가 일단 위기가 닥치자 성조기가 날개 돋친듯 팔려 나가고 무서울 정도의 단합된 힘을 보여 줬다.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그 리고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유일한 슈퍼 파워인데 그같은 힘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움이 앞섰다.

 회기를 연장하면서까지 진통을 거듭했던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 회의가 마침내 합의점을 도출, 뉴라운드를 탄생시켰다. 우리 IT업계로서는 미국에 번번이 당하기만 했던 ‘반덤핑 규정’을 일부 완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반기는 분위기다. 농수수산물 시장 개방이라는 더 큰 대가를 치렀지만 그마저도 약간의 저항 논리가 먹혀 들었다고 하니 당초 우려보다는 성공적인 회담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WTO 각료회의라는 점잖은 표현이 동원되지만 사실은 자국의 실리를 하나라도 더 챙기기 위한 각국의 피말리는 경제전쟁이라고 해야 한다. 지구촌 규모의 디지털 디바이디드(정보격차)가 핫이슈가 돼 있는 상황에서 전통 산업간 괴리가 엄존하고 있는 국가간의 밀고 당기기는 처절할 정도다. 남북 전쟁(선진국대 후진국)의 양상까지 띠고 있는 WTO 회의에서 주요 의제의 열쇠는 늘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의 입장을 배제한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진전을 기대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더구나 미국은 대부분의 산업에서 경쟁우위를 확보, 자국의 이익을 철저히 관철시키는 타입이다. 이 때문에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을 제외한 여타 국가들은 수세적 입장에 놓여 있거나 미국의 양보를 애걸해야 하는 형편이다. 더욱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 뉴라운드 출범은 미국을 비롯한 소위 북측 진영(선진국)보다는 후발 개도국의 입장이 배려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코 양보할 것 같지 않던 기득권 세력이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를 막기 위해 지배력을 일부 양보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 이번 회기중에는 향후 세계 경제질서를 가늠해 볼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중국이 WTO에 정식 가입한 것이다. 아니로니컬하게도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편입을 거부한 탓에 오히려 또 하나의 경제축으로 성장한 중국이 마침내 자유경제의 틀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미국의 경제 패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까지 거론되는 중국은 이제부터 제도권에서 미국과 싸우며 협력할 수 있게 됐다. 미국 단일지도체제의 대안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질주가 계속되지만 누구도 ‘독주’를 바라지 않는다. ‘위대한 미국’이 정의와 명분, 실리를 독점하는 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강한 미국이 자국의 이해만을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해 주길 바란다. 지구촌 가족과 더불어 가는 삶을 인정해 주길 원한다. 그것이 ‘위대한 미국’의 성숙한 지도력이고 진정한 힘이다. 뉴라운드 협상이 곧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