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현장감각과 시대감각

 ◆서현진 인터넷부장 jsuh@etnews.co.kr

 

 한국 굴지의 그룹 오너인 L회장의 이른바 ‘은둔’경영은 “최고경영자가 그렇게 무심해도 되는가”고 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경영활동의 하나인 현장독려에 무관심한 그를 두고 재계 일부에서는 ‘현장감각’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고 한다. 생전의 그의 부친(선대회장) 역시 그를 그룹 후계자로 낙점한 후 경영일선에 동반하고 다니면서 현장을 익히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우려에 대해 그는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선친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꼼꼼히 챙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대부분의 업무가 시스템적으로 움직이고 상당한 권한이 현장에 위임되어 있습니다. 현장은 사장들이 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회장이 나설 필요가 없어요.”

 바로 이 대목에서 그가 한 말이 ‘시대감각’이다. 눈앞의 일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요즘 기업환경이고 보면 기업이 나아갈 큰 흐름을 찾아 잡아주는 것이 최고경영자에게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흐름찾기에 보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장감각’은 일선 경영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독서와 전문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시대감각’을 익히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L회장의 논리는 어제의 새 기술이 오늘에는 헌 기술이 되고 마는 정보기술(IT)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억, 수십억대의 스톡옵션을 받으며 대중적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이른바 ‘스타급’ 경영자들이 백가쟁명하던 때가 엊그제였다. ‘스타 만들기’ 열풍까지 불어 적지않은 오너 경영자들이 스스로 2선으로 물러서면서 스타급 최고 경영자를 모셔오기도 했다.

 스타급들은 인터넷비즈니스 붐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한햇동안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바쁜 일과를 보낸 것으로 돼 있다. TV에 출연해서 얼굴 알리랴, 인터뷰와 칼럼쓰기를 통해 이름 알리랴, 여기저기 강연에 불려 다니랴, 각 포럼에 참석하랴, 어디 그뿐인가 저녁에는 사교모임에다 휴일에는 골프장에…. 그러면서도 그들은 회의를 주재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며 직원들의 경조사를 빼먹지 않는 모범 경영자로서의 면모를 잊지 않았다. 정말이지 몸을 몇 개로 쪼개고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려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최고경영자의 퍼스낼리티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말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던 얘기였다.

 그러나 1년 여가 지난 지금, 많은 수의 스타급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화려했던 무대를 떠났다. 그나마 남아있는 이들은 실적부진과 매출악화로 좌불안석이다. 그들에게 자리를 내줬던 오너들은 혀를 끌끌차며 복귀를 서두르고 있다. L회장의 표현대로라면 대중들이 선망했던 스타급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1년 앞도 내다보지 않고 ‘현장경영’에만 관심을 쏟았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일부에서는 스타급들이 주가나 캐피털 회사들의 투자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혹자는 그들이 벤처 붐을 일으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주가는 거품으로 끝나고 투자자금은 바닥이 났으며 벤처 붐은 시들해졌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돌아온 소득은 포말(泡沫)에 대한 아픈 기억이나 은둔에 대한 강렬한 욕망 같은 것들이었을 터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소유한 지식과 감각을 소진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지, 미래를 읽어내는 시대공부에는 인색했던 것이다. 다시 L회장 얘기로 돌아가 보자.

 L회장은 최고경영자로서 자신의 메시지를 계열사 사장들에게 간결하지만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최근에 주재한 사장단 회의에서 그는 “10년 후에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미래사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 동안 그룹을 먹여 살렸던 반도체나 생명보험이 5∼10년 후면 한계점에 도달한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미래기업의 생존능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최고경영자의 퍼스낼리티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