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경쟁 보다 앞선 협력

◆양승욱 생활전자부장 swyang@etnews.co.kr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뜻이다. 서울과 평양에 직항기가 오가고 심지어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빈소에 북한에서 온 사절단이 조문을 했다. 2, 3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자신이 취약한 제품을 상대방으로부터 공급받아 판매하겠다는 소식도 비록 사회나 정치분야에서만큼의 파괴력은 갖고 있지 않지만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케 하는 것 중 하나다.

우리나라 가전산업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자타가 인정하는 영원한 맞수다. 경쟁의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외국업체에 시장을 내주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상대방에게만큼은 시장을 내줄 수 없다는 게 양사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물론 양사의 이같은 경쟁심이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세계 제2의 자리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는 것은 부인키 어렵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발전해온 데는 상대방보다 한발 먼저 앞선 기능을 탑재한 신제품을 개발, 출시하고 소비자들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선진 마케팅기법을 경쟁적으로 채용해 온 노력의 결실이다.

따라서 그동안 대결구도로 치달아왔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이번에 전격 협력키로 한 것은 이제는 경쟁보다는 협력이 발전의 우선과제로 떠오를 정도로 상황이 일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우리나라 가전유통을 완전 장악해 왔다. 양사의 대리점들은 자본과 제품의 독점적 공급을 통해 서로 경쟁하며 그야말로 땅집고 헤엄치기식으로 사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지금은 양판점이나 할인점, 심지어는 인터넷쇼핑몰에서의 매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제조업체 대리점들의 입지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올해 전체 우리나라 가전시장에서 가전업체 대리점들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처음 50%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가전유통의 중심축이 제조업체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서로 협력키로 한 것도 자사의 대리점을 찾는 고객들에게 좀더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유통 경쟁력을 확고히 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수입다변화 품목 폐지 등으로 시장자체가 완전히 개방되고 파나소닉·소니·마쓰시다 등 일본 업체들이 대거 한국에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간 무분별한 경쟁보다는 손을 맞잡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것도 양사 협력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자신들에게 취약한 품목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데 따른 인적·물적자원을 낭비하기보다는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품목을 교환, 시장에 조기진입함으로써 가전유통에서의 장악력을 높이고 수입산 제품에 대응하기 위한 윈윈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이번 양사의 제휴가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면서도 그 성공에 대해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같은 우려는 이번 양사의 협력을 위한 논의과정에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우선 이번 양사의 제휴가 다운업(down-up) 방식이 아닌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사항은 실무진에 의해 철저히 검토되고 난 다음 고위층의 결재를 얻고 추진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이번 제휴는 양사 국내영업부문 최고책임자들이 서로 협력하자는 데 원칙적인 합의를 마치고 이를 실무진이 추진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현장에서 직접 경쟁해야 하는 실무진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양사 최고경영층에서 앞장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이번 합의가 제대로 실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벌써부터 실무진 사이에서는 윗선에서 지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추진하고 있지만 쉽게 성사가 되겠느냐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따라서 이번 양사의 제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직접 일을 챙겨야 할 실무진 스스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양사 모두 보다 글로벌화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당장의 수익보다는 급변하는 시장환경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한 대승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번 양사의 협력이 전사적인 차원이 아닌 국내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사업본부간에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같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내수시장에서만이라도 교류가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내수보다는 해외시장에서의 매출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어렵게 시작된 양사의 협력이 진정으로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내수시장만이 아닌 전세계에 산재된 양사의 생산법인 및 판매법인으로까지 확대돼야 한다. 해외 현지에서 일본업체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으면서 우리나라 경쟁업체에서는 제품을 갖다 쓰지 않는 등의 구태를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번 양사의 협력이 캠코더, 가스오븐레인지 등 한두 품목으로 한정됐지만 서로의 약점을 상대방으로부터 보완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춰 나간다는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데서 그 의의는 한없이 크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하기를 진정으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