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밀레니엄 CEO (25)

애플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44)는 빌 게이츠와 함께 PC의 역사에 가장 자주 이름을 거론할만한 CEO다. 캘리포니아 로스 알토스 출생인 잡스는 포틀랜드의 리드대학을 한학기만에 중퇴하고 워즈니악과 애플을 차렸다. 열아홉살의 잡스와 스물셋의 워즈니악은 게임업체 아타리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차고에 간판을 내건 두사람에게는 애플을 만들 돈이 없었다. 결국 잡스가 폭스왜건 마이크로버스를 팔고 워즈니악은 공학용 전자계산기를 처분해 부품값을 구했다.

 77년 이들은 애플로 「컴퓨터는 수수께끼처럼 복잡한 진공관으로 이뤄진 거대한 기계」라는 고정관념을 바꿔놓았다. 덕분에 잡스는 20대 초반에 백만장자가 됐다. 인터넷으로 거부들이 쏟아져나오는 요즘 풍토와 달리 그때만 해도 잡스의 성공신화는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매킨토시로 퍼스널 컴퓨터의 혁명을 주도했으면서도 85년 애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그것도 자신이 펩시콜라에서 스카우트해온 대표이사 존 스컬리와의 주도권 다툼끝에 회사를 떠나게 된 것. 그야말로 컴퓨터업계의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보잘 것 없는 엑스트라로 전락한 셈이다.

 하지만 잡스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에 넥스트소프트웨어를 차리고 재기를 노린다. 그는 루카스영화사로부터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스튜디오를 6000만달러에 사들이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픽사는 95년 영화의 역사에 기록할만한 기념비적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제작했다.

 96년 마침내 스티브 잡스는 회장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애플에 돌아왔다. 11년만의 컴백이었다. 당시 애플은 적자가 누적되면서 PC시장 점유율이 3.4%로 떨어져 웬만한 통계에서는 컴팩-IBM-델-휴렛패커드 등 대형업체에 밀려 기타업체군으로나 분류됐다.

 97년 9월 친정 애플의 CEO를 다시 맡을 때도 애플은 2년 남짓한 기간에 20억달러의 적자가 쌓이며 좀처럼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직원들의 눈에서는 예전의 뜨거운 열정도, 명확한 기업전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잡스는 벤처기업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먼저 1만7000명의 직원을 절반수준인 9600명으로 줄였다. 거액의 보너스 지급도 중단했다. 그대신 사원 전원에게 스톡옵션을 줬다. 15종류이던 제품 수는 4개로 줄였다.

 그 결과 98년부터 애플은 흑자로 돌아섰다. 애플은 전혀 새로운 디자인의 PC인 i맥과 i북을 발표, 예전의 인기를 되찾는다. 「기술혁신자로서, 컴퓨터업계를 압도했던 시절로 돌아가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i로 시작하는 제품명에서 드러나듯 애플은 인터넷시대의 PC에 초점을 맞췄고, 직사각형인 일반 PC와는 달리 땅딸막한 크기에 모니터와 본체가 하나의 곡선으로 이뤄진 밀레니엄시대에 걸맞은 제품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스티브 잡스 부부는 고기·버터·치즈를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기업가로는 데이비드 패커드와 앤디 그로브를 꼽고 가수 중에는 밥 딜런을 좋아한다. 친한 친구는 래리 엘리슨.

 경영자로서 잡스는 신화적 인물이 됐지만 인간적으로는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다. 히피 출신의 로맨틱한 이상주의자로 그려지는가 하면 자라목을 한 이기주의자라는 악평도 듣고 있다.

 아무튼 그는 사라지는 회사로 인식됐던 애플의 부활신화를 이뤄냈다. 그리고 다가올 밀레니엄에는 애플을 컴퓨터업체에서 정보가전업체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잡스는 애플외에도 컴퓨터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Pixar)의 회장으로 「정말 뛰어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를 1년에 한편씩 만드는 꿈을 펼치고 있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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