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IMF 태풍 (7·끝);에필로그

4일 국내 모든 언론에 등장한 한장의 사진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신탁통치」를 가장 실감나게 표현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기자들의 질문에 여유있게 답변하는 미셀 캉드쉬 IMF 총재와 참담함과 비통함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임창렬 부총리,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한국으로선 경제정책 일반, 금융, 산업 모든 분야에 걸쳐 「줄 건 다 주고」 결국 5백50억달러의 긴급자금을 IMF로부터 지원받게 됐다. 앞으로 3년간은 경제주권을 상실한 채 IMF가 시키는 대로 국내 산업을 움직여갈 수밖에 없게 됐다.

「IMF 통치시대」는 국내 전자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 기업들 사이에선 「2020시리즈」가 유포되고 있다. 금리 20%, 주가 2백선, 환율 2천원(달러당) 체제가 곧 닥친다는 것이다.

외국자본 밀물 불보듯` 만약 2020시리즈가 현실로 다가온다면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정도의 경영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은 단 한군데도 없을 것이다. 물론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 덧칠돼서 나온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그만큼 현재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2020시리즈는 국내업계가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단적인 「심리적 공황」상태를 나타낸다. 기업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주체인 사람들이 이같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은 큰 문제다. 군의 생명이 사기이듯, 기업인의 핵도 도전과 창조정신이기 때문이다.

그 공황상태를 비집고 외국자본, 외국기업이 들어올 것이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인 한국시장을 겨냥, 정부와 산업계가 똘똘 뭉쳐 압력을 가해왔다. 그들은 이번 IMF 지원자금과 연계, 그간 한국정부로부터 당해왔던 유무형의 각종 족쇄를 풀라는 노골적인 압박을 가했고 또 최대의 성과를 옳렸다.

실제로 월스트리트 저널의 2일자 보도에 따르면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일부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을 반대한다며 미 연방정부를 상대로 로비활동에 나선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들의 요구가 얼마나 수용될지는 몰라도 자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미국정부로서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정부에 더 많은 문호를 개방하라는 압력을 넣을 수밖에 없다.

벌써 IMF와의 합의문 내용 중에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수입선 다변화 정책의 조기폐지가 명문화돼 있다. 향후 1백억달러를 지원키로 한 일본의 집요한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당초 오는 99년까지 2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폐지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던 우리 정부는 채권자가 될 일본의 압력에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다.

일부에서는 수입선 다변화에 대비, 국내 전자업체들이 이미 충분한 내성을 길렀고 기술력과 마케팅 기법 역시 일정수준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큰 걱정거리는 아니라고 지적하지만 워낙 국산의 수준이 뒤지는 부문이 많아 우려가 절대적이다. IMF와의 협상이 일단락됨에 따라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예상하는 기업환경 변화는 실로 엄청나다. 일단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3% 수준에서 결정되면 통화증가율은 13%에 이르고 물가 상승률은 5% 안팎으로 전망된다.

투자심리와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돼 물가상승률은 그리 높지 않겠지만 환율 상승, 세금 및 공공요금 인상 등이 줄줄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 저성장속의 고물가 현상인 스태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다. 여기에 대외 신인도 추락으로 해외재원 조달도 불투명하게 된다. 한국 최고의 우량기업인 SK텔레콤이나 삼성전자도 주가하락 등의 여파로 해외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으로까지 몰려 있다. 한마디로 기업의 경영환경이 극도로 악화된다는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특히 IMF의 직격탄을 맞게 될 대규모 설비투자와 관련된 업종은 초조함이 더하다. 이미 64MD램에 정착한 일본을 추격하기 위해 대단위 투자를 계획한 반도체업계는 재원조달 문제에 부딪혀 예정된 투자를 유보하거나 축소한다면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동부처럼 그룹차원에서 야심작으로 발표한 반도체시장 진입 역시 어려움이 뒤따르게 된다.

각사에서 5천억원에서 1조원이 넘는 설비 및 운용 투자비가 필요한 통신서비스업체들도 마찬가지다. 휴대폰, 개인휴대통신(PCS)은 물론이고 신규 유선사업자들도 가뜩이나 부족한 자본금을 채우기 위해 주식공모를 계획하고 있지만 주식시황이 워낙 나빠 공모일정을 계속 늦추고 있다.

더욱이 경영권을 둘러싼 지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일부 무선 통신사업자들에겐 외국자본의 공격이 더욱 부담스럽다. 정부가 외국인 지분을 내년까지 33%(한국통신 제외)로 제한한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외형의 절대조건을 차지하는 시스템 통합(SI)이나 산전업체들도 전전긍긍이다. 가전업체들은 그간 미워왔던 구조조정이 타율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도 혁명적 수준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좌불안석이다. 이 때문에 대단위 투자를 진행중인 전자업체들은 IMF체제가 한해만 늦어도 좋았을 것이라며 발을 동동구르고 있다. 내년까지만 투자를 지속한다면 어느 정도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을텐테 시기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내년 한해의 투자손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6년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어차피 맞게 된 IMF체제라면 여건만 탓하고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것이 전자정보통신업계 전체의 분위기다. 이제부터 거품을 빼고 허리띠를 졸라맨 채 다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왕좌왕하다가는 한국의 국제경쟁력이 회복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벌써 대부분 그룹사에서부터 중소기업까지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주종은 역시 대대적인 구조조정, 경비 및 원가절감이다.

삼성의 일부 전자계열사는 그간 3년마다 30%씩 경비를 줄이겠다는 「3030」 운동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한해에 30%씩 절감하자는 「1030」 운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대우그룹은 불필요한 접대비를 50%나 줄이기로 했고 LG그룹은 회장실을 중심으로 격주 휴무제를 폐지, 토요일에도 출근키로 했다.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인력감축 문제도 속속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우그룹은 감축 대신 임금삭감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였다. LG그룹 역시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안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분위기를 전환하는 이같은 정서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선택과 집중의 경영체제가 하루빨리 정착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부문에 대해서는 집중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재원조달 문제로 극도의 투자위축이 불가피하고 전체적인 규모 역시 대폭 삭감됐다 하더라도 우선 순위를 가려 반드시 투자해야 할 부문에는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64M 반도체나 이동 및 유선통신 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부실부문이나 업종다각화를 겨냥한 신규투자는 줄이거나 중단하고 경영자원을 한곳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야말로 IMF시대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유일한 무기라는 지적이다.

"정보화 투자는 늘려야" 또 정보화 투자를 오히려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지난 80년대 말과 90년대초 불황기에 GDP 대비 정보화 투자가 더 많았던 미국과 그 반대였던 일본의 사례를 상기하라는 것이다. GDP가 하락한다고 정보화 투자마저 GDP 하락률 이하로 시행한 일본은 현재 한국 못지않는 홍역을 치르고 있고, 반대의 경우였던 미국은 전후 최대의 호황기를 구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할 수 있다」는 경제적 분위기, 선택과 집중의 경영, 과감한 정보화 투자 확대가 IMF시대의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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