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 규제는 우리 경제 약점을 겨냥한 공격이다. 일본은 독보적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소재·부품·장비를 무기화하며 우리나라 주력 산업에 타격을 가하려 했다.
핵심 자원을 일본에 의존한 한국이 수출을 많이 해도 이익은 일본에 돌아가는 '가마우지' 경제 구조가 드러났다. 저성장구조 고착화 속에 뚜렷한 미래먹거리를 찾기 어려운 2중·3중 위기가 중첩됐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 산업이 처한 현실을 면밀하게 분석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분야를 찾는 일은 최우선 과제다.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민·관이 전략 분야를 집중 육성해 '퍼스트무버(First Mover)'로 거듭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당장 돌파구가 보이지 않더라도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개념설계 역량과 원천기술을 육성하는 일이 급선무다. 장기적 관점과 더불어 도전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문화로 전환도 필수다.
◇글로벌 기술패권 전쟁
글로벌 시장의 기술 패권 전쟁 양상이 원천기술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화웨이는 중국 청두에서 '이노베이션 2.0 비전'을 공개했다. 1000여명의 기초과학자를 투입해 네트워크기본 알고리즘과 인공지능(AI)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화웨이는 30년간 네트워크 장비·스마트폰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 품질을 따라잡았지만,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퍼스트무버가 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쳤지만, 미·중 무역갈등으로 운용체계(OS)와 칩셋 등 핵심 부품이 차질을 빚게 됐다. 이제라도 독자 기술을 확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나라를 겨냥한 일본의 수출규제도 일본이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한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에서 시작됐다.
최계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실장은 “거래 금지 조치는 기술패권을 위해 경쟁국에 대한 우위 영역의 거래 제한 등을 통한 지정학적 목적 달성 추구로 이해된다”면서 “미·중 무역갈등으로 공급망상 상호 의존성의 무기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경제 전쟁 축은 품질과 가공능력, 생산력 위주에서 원천기술 위주로 이동하고 있다. 강력한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시장 선도자가 되겠다는 전략 목표 설정은 당면 위기 극복뿐 아니라 장기 관점에서 국가 지속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핵심과제다.
◇소재·부품·장비 당면 위기대응
우리나라가 글로벌 시장 선도자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세밀하게 선택과 집중 전략을 수립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전망이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기존 기술수준, 효율성, 글로벌 시장 전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기술 수준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끌어올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당면한 과제는 소재·부품·장비 분야 경쟁력 강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화학(55.6%), 자동차(36.9%), 철강(34.6%), 반도체·디스플레이(29.2%) 등 주력 수출 산업은 핵심 소재와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R&D에서 핵심 분야를 선정해 2022년까지 5조원 이상 투자할 계획이다.
전략 투자분야에는 반도체 부문 전략핵심소재 자립화, 5G기반 장비단말부품, 디바이스 기술, 제조장비 스마트 제어기(CNC), 반도체 EUV광원 등이 포함됐다.
우리나라가 강점을 보이는 생산품 관련 소재·부품·장비 원천기술 확보로 당면한 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물론, 산업 가치사슬 자립화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이 공감하는 위기 속에 범국가적 대책을 수립한 만큼, 점검은 물론 관련 예산이 통과될 수 있도록 예비타당성평가와 국회 예산배분 과정에서 '패스트트랙'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장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전략분야 기술에 대한 유연한 선정 기준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장기적 기술력 확보는 우리나라 경제의 기초 체력을 확보하는 데 있어 필수 과제다.
퍼스트무버가 되겠다는 전략목표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뻗어나가야 한다.
위기에 봉착한 소재·부품·장비 등 하드웨어(HW) 산업을 넘어 소프트웨어(SW)와 네트워크 기술 등 전반을 고려해 글로벌 시장 성장 산업을 면밀히 분석하고 우리 강점을 살려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ICT 등 우리 강점 살려야
미래 핵심산업 중 가장 중요한 분야는 단연,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5G, 양자정보통신 등 ICT 분야를 손꼽을 수 있다. 과기정통부가 D-N-A로 명명한 해당 분야는 산업 자체로서 경제가치뿐 아니라 제조업, 자동차, 건설, 군사 등 다양한 전통산업과 결합하며 생산성과 경제 가치를 극대화하는 핵심 첨단 기술이다.
ICT 분야는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강점을 지닌 분야이기도 하다. 과기정통부 2018년 기술수준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세계 11대 산업 분야 가운데, ICT·SW 분야에서 최대기술 보유국 대비 기술수준(80.2%)이 가장 높고 기술격차(2.1년)가 가장 적은 것으로 평가됐다. 우리나라 ICT 기술력은 미국과 일본, 중국에 뒤처지지만 기술 격차는 가장 좁다. 5G 네트워크 장비의 경우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 5G 광중계기, 스몰셀 등을 개발했다. 특허, R&D 등 지원으로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퍼스트무버가 되도록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ICT 분야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해서는 일반 R&D 진흥 정책과 달리 규제 개혁이 필수다. AI 알고리즘을 진화시키기 위한 원천 데이터가 있어야 하지만 규제로 활용이 제한된다. 규제해소는 일방적으로 진행하긴 어렵다. 국가차원의 신성장 동력 발굴이 필요하다는 대의 속에 지속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 약점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우주·항공·해양 분야가 최대기술 보유국 대비 기술수준(65.1%)이 가장 낮고 기술격차(8.4년)가 가장 큰 것으로 평가됐다. 해당분야는 언젠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서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분야로 지목됐다. 왜 약한지 분석하고 기초 기술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퍼스트무버로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문화도 중요하다.
국가적 기술개발 과제를 도출하고 원천기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산·학·연·관이 더 자주 만나며 소통해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는 저서 축적의 길에서 “성장엔진이 식어가는 우리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전적인 시행착오를 용인하는 개념설계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와 사회 전반에서 단기 성과가 아니라 장기적인 기술축적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표]11대 분야별 기술수준 및 기술격차(출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박지성기자 jis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