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망 중립성 규칙이 결국 폐기 운명을 맞았다. 2010년대 들어 벌써 세 번이나 재정과 폐기를 반복했다. 인터넷 시장 환경이 뿌리에서부터 변하면서 인터넷 사업자와 콘텐츠 사업자의 '공동 이익'이 희미해진 게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과 지능정보사회에서 인터넷 네트워크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헤게모니 싸움' 성격도 짙다.
◇3년 못 버틴 망 중립성
미국 망 중립성 정책은 3년을 버티지 못했다.
2015년 2월 오바마 행정부 당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강한 망 중립성 규칙을 가결했으나 2년 10개월여 만에 트럼프 행정부 FCC에 의해 뒤집힐 운명에 처했다.
망 중립성 규칙 폐기 핵심은 미국 통신법에서 '통신서비스(타이틀Ⅱ)'로 분류하던 인터넷을 '정보서비스(타이틀Ⅰ)'로 재분류하는 것이다.
통신서비스는 '커먼 캐리어'라는 개념 아래 해당 서비스에 강한 규제를 가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금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고 서비스 이용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이 개념이 망 중립성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반면에 정보서비스는 정보를 전송하는 역할만 하므로 특별한 규제 대상이 아니다. 이번 망 중립성 규칙 폐기는 인터넷을 정보서비스로 보겠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인터넷 사업자는 자체 판단에 따라 정보 전송 등에 차별을 가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2015년 망 중립성 규칙 제정 당시 FCC가 내세운 원칙은 △차단금지 △지연금지 △우선처리금지 △합리적 트래픽 관리 허용이었다.
망 중립성 규칙이 폐기되면 인터넷 사업자는 특정 콘텐츠를 차단하거나 전송속도를 늦출 수 있고, 대가를 내면 특정 트래픽을 우선 처리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뉴욕타임스는 “망 중립성 원칙이 폐기되면 통신 공룡 AT&T나 미 최대 케이블TV 업체 컴캐스트 같은 회사가 특정 사이트나 온라인 서비스 접근에 더 많은 이용료를 부과하고 경쟁업체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혁신이냐 망투자냐
망 중립성 논쟁은 '혁신이냐 망 투자냐'라는 대립으로 귀결된다.
망 중립성이란 트래픽이 내용이나 유형, 단말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전송될 수 있도록 인터넷 망을 설계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인터넷 사업자와 콘텐츠 사업자가 상호 의존하던 인터넷 시장 고도 성장기에는 유효했다. 콘텐츠 사업자는 트래픽이 자유롭게 흘러서 좋고, 인터넷 사업자도 가입자가 늘어 서로 좋았다. 특히 다양한 콘텐츠 사업자가 등장해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만들어지자 인터넷이 '혁신의 원천'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인터넷 시장 성장이 정체되자 갈등이 불거졌다.
무엇보다 통신시장이 데이터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트래픽이 급증했다. 통신가입자가 포화하면서 인터넷시장은 성장이 정체된 반면에 인터넷망을 등에 업은 콘텐츠 플랫폼사업자는 급성장했다.
인터넷 사업자가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며 네트워크 투자비를 콘텐츠 사업자가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 망중립성 논쟁의 근본 원인이다.
콘텐츠에 기반한 혁신 서비스가 무수히 등장하는 상황에서 네트워크 투자비를 회수하기 위해 혁신을 억제해야 하는가가 논쟁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양질의 네트워크야말로 혁신의 토양이라는 점에서 망투자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망중립성 판단의 어려움이 있다.
◇지능정보사회 주도권 쟁탈전
망 중립성 논쟁은 정보통신기술(ICT)의 미래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주도권 쟁탈전 성격도 가졌다.
'제4차 산업혁명' 등으로 지칭되는 미래의 ICT 세상에서는 대용량 정보 전송이 필수인데, 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비용을 누가 댈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래의 ICT 세상을 '지능정보사회'로 명명했는데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클라우드·5G가 핵심 요소 기술이다.
자율주행차나 가상현실(VR), 증강현실(AI), 원격진료 등은 요소 기술을 구체화한 것이다. 여기에 대용량 정보 전송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망 중립성을 둘러싼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논쟁은 갈수록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망 중립성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도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망 중립성이 영원한 가치가 아니라 형편에 따라 변하는 유동 개념이라는 점은 미국 통신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1934년 AT&T 전화 사업 독점 논란을 계기로 탄생한 망 중립성 개념은 2010년 FCC의 '오픈 인터넷 오더'로 구체화됐으나 2014년 버라이즌 소송으로 법원에서 무효화되고, 2015년 FCC에서 되살렸으나 3년여 만에 다시 폐기 운명을 맞는 등 시장 상황과 정권 성향에 따라 바뀌어왔다.
김용주 통신방송 전문기자 kyj@etnews.com, 오대석기자 od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