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AI 육성의지 밝혔지만 '저작권법 개정안' 논의 제자리

“인공지능(AI) 개발을 위해 방대한 저작물을 이용한 머신러닝이 필요하지만 수많은 원저작자에게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최악의 경우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어 쉽사리 연구를 시도하지 못한다.” (인터넷기업 A사 법무팀 임원)

국내 기업과 대학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AI 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형사처벌이 두려워 연구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AI 정부'를 선포했지만 기초연구에 필요한 저작권법이 정비되지 않으면서 데이터 수집 활용이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난해 관련 저작권법을 개정하면서 '머신러닝 천국'으로 불리는 것과 비교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더이상은 '패스트팔로어'에 머물지 않겠다며 밝힌 AI 국가전략산업 육성의 의지가 무색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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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인공지능 콘퍼런스 데뷰(DEVIEW) 2019에서 로봇 미니치타를 직접 조정해 보고 있다. 이 로봇은 이번 행사에서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사진:청와대>

29일 국회와 대학, 기업 등에 따르면 현행 저작권법은 입법과 행정, 학교 교육, 시사 보도, 개인 사용 등 일부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는 저작물을 무단으로 복제·이용할 수 없다. 또 '저작물'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폭넓게 정의한다.

이를 적용하면 AI 고도화를 위한 머신러닝과 딥러닝 과정에서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행위의 상당 부분이 저작권법에 저촉될 수 있다. AI 저작권법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기업이 함부로 원저작자의 허가 없이 저작물을 수집해서 머신러닝에 사용했다가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국내 AI 기술·연구·서비스 개발을 가로막는 장벽이 서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기업과 대학은 공공정보데이터나 개인이 사용을 승인한 제한된 정보 위주로 AI를 개발하고 있다. 한 인터넷기업 임원은 “우리나라는 AI 저작권법과 관련해 판례는 물론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어 연구에 한계가 있다”면서 “자칫 대규모 저작권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어 어려운 상황”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대학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학은 연구 목적으로는 저작물을 AI 개발에 사용할 수 있지만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면 저작권 침해 이슈가 발생한다. 대학의 연구개발(R&D) 성과는 기술 이전을 통해 산업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학 또한 AI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상조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학이 연구 목적으로 저작물을 사용하면 괜찮지만 개발한 AI 서비스가 기술 이전을 통해 기업에 넘어가면서 영리 목적을 취할 때 저작권 침해 이슈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AI 기술 개발의 핵심 재료인 저작물 관련 저작권법에 대한 논의는 진전이 없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데다 다른 현안에 밀리기 때문이다. 20대 국회 들어와 발의된 저작권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총 30개다. 이 가운데 AI 기술 개발 등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법안은 5개 안팎이다.

박정·우상호(이상 더불어민주당)·염동열·주호영(이상 자유한국당)·이찬열(바른미래당)이 각각 대표발의했다.

△사적 이용을 위한 복제에서 제외되는 범위를 기술 발달을 반영해 명확히 하는 등 디지털 시대 저작물 이용 환경을 합리적으로 정비 △빅데이터 활용 활성화를 위해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 저작물 등을 복제할 수 있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등의 내용이다.

이들 법안은 담당 상임위원회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상정된 후 논의되지 않고 있다. 문체위 관계자는 “사유재산권이 걸린 문제여서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이라면서 “사실상 수정이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개인정보보호법 등 빅데이터 3법도 정쟁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저작권법까지 살펴볼 여력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반면 일본은 지난해 AI 관련 저작권법을 대폭 개정, 연구 길을 텄다. 유연한 권리 제한 규정을 신설, AI 등에 사용되는 저작물은 필요성이 인정되는 한도에서 이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일본 내에서도 저작권법 개정에 반발이 거셌지만 아베 신조 총리 등 집권층이 4차 산업혁명 시대 대비를 위해 강행했다. 국회 관계자는 “AI가 중요하다며 퍼스트무버를 자처하지만 일본이 미리 준비하는 중에도 정부와 정치권의 인식은 허상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했다.

인터넷기업 관계자는 “기업이 원저작자를 다 찾아가서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우리나라도 AI 이용에 대한 저작권을 명문화하거나 정부 가이드라인이라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 교수는 “AI서비스가 빠르게 일상 속으로 확산되는 만큼 AI 관련 저작권법 논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저작권법 소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빅데이터 등 신기술에 대응해 연구,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외국도 아직 확실하게 법이 개정되지 않았다. 어떤 것이 필요한지 학계와 협의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안영국기자 ang@etnews.com, 전지연기자 now2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