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초, 애플과 IBM PC가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연구년을 맞아 스탠퍼드대로 떠난 권욱현 서울대 교수는 벤처를 직접 느끼기 위해 신생 기업 'OSM컴퓨터'를 찾아가 무보수 여름방학 근무를 자처하며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했다. 또 그는 사비를 털어 UC버클리의 야간 코스를 수강하며 PC의 핵심 부품인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를 공부했다. 권 교수는 당시 삼성전자 일본 지사장이었던 윤종용(훗날 삼성전자 회장)에게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산업의 미래를 바꿀 것이니 이 길로 가야 한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하드웨어(HW) 산업의 운명을 예감했다.
서울대로 돌아온 권욱현 교수는 이론적 연구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실전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연구실을 구축했다. 그는 삼성, LG, LS산전, 포스코 등 국내 유수 대기업으로부터 고난도의 연구과제를 수주해 제자들에게 실제 '물건(System)'을 만드는 훈련을 시켰다. 무엇보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 프로그래밍이 가능해지면서, HW를 소프트웨어(SW)로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게 된 기술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이러한 도전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대규모 연구과제 수주는 HW 벤처가 태동하는 기술적 요람이 되었다. 대표 성공사례가 된 휴맥스 창업 팀은 권 교수 연구실에서 LG전자와 수행한 '영상 및 데이터 신호 조합' 연구에 참여하며 디지털 영상 처리의 핵심 기술을 익혔다. 이 역량은 올림픽 방송의 자막 처리 시스템 국산화와 컴퓨터 노래방 기기 개발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휴맥스는 아시아 최초로 디지털 셋톱박스를 제작,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권 교수는 원전 분산제어시스템(한전), 고속 전력선 통신망 기반 홈 네트워크 개발(LG·삼성), 루프 컨트롤 개발(삼성전자) 등 산업 현장의 핵심 신경망을 다루는 과제들을 주도했다. 제자들은 연구실에서 밤낮없이 HW 보드를 설계하고 제어 알고리즘을 코딩하며, 대기업조차 해결하지 못한 기술적 난제를 풀어나갔다. 이것이 바로 '권욱현 사단'이 창업하자마자 외산 제품을 압도하는 국산 HW를 내놓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1990년대 초반,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가 창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 실패가 곧 사회적 낙오와 파산으로 직결되던 시절, 권 교수는 제자들의 뒤에서 든든한 인생 안전망을 구축해 두었다. 만약 제자가 사업에 실패한다면, 자신의 학문적 위상과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에 취업시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제자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창업에 뛰어들게 만든 원천이 됐다.
이런 연구실 내의 신뢰 위에서 제자 130여 명 중 40여명이 창업에 뛰어들어 세운 12개 벤처기업의 연간 매출액 합계는 2조원을 넘어섰다. 이들은 외산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제어 기술과 시스템을 국산화해 막대한 수입 대체 효과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 기술을 가진 수출 강국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이재원 대표의 슈프리마는 정밀 제어와 인식 알고리즘을 생체인식 보안 영역으로 확장해 글로벌 시장에 도전했고, 김용훈 대표의 파인디지털은 고속 통신망 연구 역량을 모빌리티에 투영해 내비게이션과 차량용 통신 장비의 국산화를 주도했다. 김덕우 대표의 우리기술은 원자력 발전소의 두뇌인 제어계측 시스템을 분산제어 과제를 통해 성공적으로 국산화했다. 물론 이런 성과 이면에는 도전에 대한 안전망이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교수 개인의 인맥과 영향력이었다는 한계도 공존하며 학연 관계가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였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결실의 기반은 반세기 전 버클리대 강의실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회로도를 그리던 권 교수의 집념에 맞닿아 있다. 거대 자본과 알고리즘이 산업의 판도를 뒤흔드는 AI 시대에, 우리가 다시금 스승의 혜안과 제자들의 야성을 호출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유전자를 복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가올 딥테크 전쟁에서 우리나라 독자적인 기술 영토를 지켜내고 새로운 산업사를 써 내려갈 이정표가 될 것이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