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젊었을 때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그 말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나이 들어서 경험이 쌓이고 보니,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그 말대로 행동하는가를 본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남긴 이 조언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알파, Z, M, 베이비부머 세대 등 다양한 세대가 공존하는 지금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 모두가 행동을 하는 원인과 이유의 연결성이 다르고, 이를 공감하지 못해 갈등이 생긴다.
20·30대는 생각한다. “함께하자고 했으니 왜 바로 움직이지 않지?”
40·50대는 되묻는다. “아직 구조도 없는데 왜 몸부터 던지지?”
같은 문장을 두고도 한쪽은 실행 약속으로 듣고, 다른 한쪽은 방향 합의로 듣는다. 그러니 서로의 진심이 어긋나 보인다. 젊은 세대는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느끼고, 기성세대는 상대가 너무 조급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가벼움이나 무거움 때문만이 아니라, 같은 약속을 감당하는 몸의 조건과 시간의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람의 근력과 근파워는 대체로 30~35세 무렵 정점에 이른 뒤 서서히 감소하고, 이후에는 기능적 여유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한 번 말한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신체적 비용”이 커지는 것이다. 반면 신체적 비용을 대신 할 수 있는 누적된 통찰력이 생기게 된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조직 안의 많은 갈등은 쉽게 도덕 문제로 번진다. 젊은 구성원은 “말만 하고 책임지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나이 든 구성원은 “세상 물정을 모른 채 무작정 덤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둘 다 자기 방식의 진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20·30대에게 진심은 행동의 속도로 드러난다. 40·50대에게 진심은 오래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한쪽은 먼저 뛰는 것으로 증명하고, 다른 한쪽은 함부로 뛰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진다.
그래서 세대 간 소통에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지금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함께하자는 말이 즉시 실행을 뜻하는지, 준비를 전제로 한 동의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이 열 명의 헌신인지, 세 명의 실험인지, 한 명의 검증인지도 나누어 말해야 한다. 말의 온도만 맞출 것이 아니라, 행동의 단위와 책임의 범위까지 합의해야 한다.
여기서 공자의 통찰은 다시 살아난다. 사람을 볼 때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만 보지 말고, 그 말대로 행동하는지를 보라는 조언 말이다. 이제 이 문장을 조금 더 넓게 읽어야 한다. 행동은 단지 즉각적인 돌진만을 뜻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행동은 먼저 몸을 던지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 행동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이 진실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과 행동 사이의 연결 방식이 사람마다, 세대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결국,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설계다. 같은 말이 다른 몸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알지 못하면, 진심도 오해가 된다. 그러나 서로의 몸의 조건과 시간의 감각을 이해하면, 말은 약속이 되고 약속은 구조가 된다. 그리고 그 구조 위에서야 비로소 세대는 충돌하는 집단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렇다. 이번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 보다, 같은 약속을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다시 나누는 지혜이고, 세대를 넘어, 체력의 차이를 넘어, 말과 행동의 간극을 투명하게 메우는 구조 설계를 할 수 있어야 우리의 공동체는 지속 가능할 수 있다.
함성룡 (재)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상임이사(CF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