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한 리조트 운영사는 시설 교체를 위해 전국 수백 명의 회원권 소유주에게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등기우편을 보내고, 현황을 정리하는 데 여러 직원이 수개월을 매달렸다. 전자서명이었다면 한 사람이 일주일이면 끝냈을 일이다. 정보기술(IT) 강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에서, 계약을 하는 수단은 여전히 종이에 머물러 있다.
이 낡은 관행의 뿌리에는 '인감증명제도'가 있다.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 식민지 통치 체계의 일부로 한국에 이식한 제도로, 전 세계에서 한국, 일본, 대만 등 극히 일부 국가만 유지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도장 없이 당사자 간 합의만으로도 계약은 성립한다. 그런데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인감도장 찍어오세요”라는 말이 법보다 앞선다. 제도가 관행을 만들고, 관행이 거래 방식을 굳혀버린 셈이다.
우리가 '아날로그 재팬'이라 비웃던 일본은 이 지점에서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일본은 경제적 유인, 법, 예산이라는 세 가지를 차곡차곡 갖춰 나갔다. 먼저 경제적 유인이다. 2000년부터 전자계약 문서에 인지세를 매기지 않아, 전자계약을 쓰면 세금이 줄어드는 셈이었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전환점이 됐다. 재택근무 중에도 도장을 찍으러 출근해야 했던 '도장 출근(ハンコ出社)' 사태를 겪자, 법이 움직였다. 도장이 필요한 행정절차 1만5000개를 전수 조사해 2022년까지 99% 이상을 폐지했고, 예산이 뒤따랐다. 총리 직속 '디지털청'에 연간 4조원을 쏟아부었다. 세 가지가 맞물리자 전환이 빨라졌다. 일본 1위 전자계약 서비스는 300곳 이상의 지자체에 도입돼 누적 3000만건 이상을 처리했다.
반면 한국은 거꾸로 갔다. 2000년,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자문서에는 인지세를 면제했다. 출발은 같았다. 그런데 2010년 법 개정으로 전자문서도 과세 대상이 됐고, 2015년부터는 그 범위를 넓혔다. 디지털로 바꾸면 더 편하고 저렴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정부가 진입 장벽을 세운 꼴이다. 일본이 유인을 유지하며 법과 예산까지 더할 때, 한국은 유인마저 거둬갔다. 일본이 쌓은 세 가지 중 한국은 계약 영역에서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를 되돌렸다.
5000년간 점토판, 양피지, 종이로 매체만 바뀌었을 뿐, 계약은 줄곧 실물에 갇혀 있었다. 이 관성을 깨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인공지능(AI)이다. 서랍 속 종이 계약서는 AI에게 해독 불가능한 '죽은 정보'일 뿐이다. 전자계약으로 바꾸면 계약서 속 매출, 비용, 리스크 정보가 AI가 읽고 분석할 수 있는 '살아있는 데이터'가 된다.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수억 건의 계약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관리를 자동화하고 있다. 계약이 데이터가 되지 않으면, AI에게 줄 원료가 없다.
물론 희망은 있다. 가장 보수적인 부동산 영역에서 먼저 움직였다. 부동산거래전자계약시스템은 대출 우대금리와 확정일자 자동 부여라는 확실한 혜택을 내걸고 현장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개정 도시정비법은 재건축 현장에서 전자서명과 온라인 총회를 합법화했다. 혜택을 주고 규제를 걷어내자 이용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10년간 전자계약 현장에서 기업과 기관을 만나며 느끼는 점은 하나다.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의지다. 인감증명제도, 인지세 같은 걸림돌을 치우고, 전자계약이 기업, 기관에 도움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인감증명제도를 만든 나라는 스스로 그 제도를 뜯어고치고 있다. 그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가 거기 묶여 있을 이유는 없다. 계약이 데이터가 되는 순간, AI 전환의 진짜 출발선에 서게 된다. 기술은 준비돼 있다. 남은 건 제도를 바꾸겠다는 결단뿐이다.
이영준 모두싸인 대표 yj.lee@modusig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