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전력 인프라 디지털 전환 선도기관
GW급 VDC-HVDC 변압기 국산화 착수
HVDC 기술 실증·표준화 국가거점으로
국내 HVDC 산업 생태계 본격 확대 기대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 탄소중립 이행, 재생에너지 확대 등 국가 에너지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에너지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전환이 정부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그 중심에 한국전기연구원(KERI·원장 김남균)이 있다. KERI는 전력기기·전력계통 융합 전문 연구기관으로서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 고속도로' 기반 기술 연구개발(R&D)의 핵심 허브 역할을 수행 중이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재생에너지 생산지와 수요지를 초고압직류송전(HVDC) 방식으로 연결하는 대형 송전망 인프라 사업이다.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발전은 주로 해안이나 산간 지역에 분포해 있지만 수요는 수도권 등 도시와 산업단지에 집중돼 있어 생산과 수요지의 지리적 불균형이 존재한다. 산업 측면에서도 반도체 등 대형 전력 수요처가 증가하는 가운데 안정적인 고용량 송전망 확보는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기존 교류(AC) 송전 방식은 직류(DC)와 비교해 장거리·대용량 송전에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도 HVDC 분야 기술 경쟁이 치열하며 국내 산업 생태계와 기술 자립 측면에서도 전략적 의미가 크다.
국가 에너지 전환과 전력망 혁신의 전략적 기반으로서 KERI는 정부의 에너지 고속도로 정책 성패와 직결되는 1호 R&D 과제인 'GW급 전압형(VSC)-HVDC 바이폴(Bipole) 변환용 변압기' 엔지니어링 기술 사양 정립 및 국산화라는 중책을 맡았다.
VSC-HVDC는 전력용 반도체를 활용해 DC 전압과 유·무효 전력을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차세대 송전 기술이다. 기존 전류형(LCC)은 교류 계통 전압에 의존하지만 VSC-HVDC는 자체적으로 전압을 생성하고 제어할 수 있고 지중·해저 케이블 연계에도 적합하다.
재생에너지에 집중한 유럽, 중국 등을 중심으로 신규 HVDC 프로젝트의 상당수는 VSC 방식으로 전환되는 추세다. 국내에서는 최근 VSC-HVDC의 실 계통 적용과 실증이 본격화 단계에 들어선 만큼 핵심 기술의 외산 의존도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VSC-HVDC 기반 기술 개발의 중심에 선 KERI의 역할을 주목하는 이유다.
◇ GW급 VDC-HVDC 변압기 국산화 앞장

광주에 있는 KERI 스마트그리드본부는 국가 전력 인프라의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연구와 실증 거점이다. KERI는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을 이끌 주요 기술인 저탄소(Decarbonization), 분산전력(Decentralization), 디지털(Digitalization)의 D3와 이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DC 시스템 기술까지 내포한 'D3+DC 그리드' 전략을 수립하고 광주 도시첨단산업단지를 터전으로 2020년부터 스마트그리드본부를 운영해왔다.
KERI 스마트그리드본부는 △전력변환시스템연구센터 △분산전력시스템연구센터 △에너지플랫폼연구센터 △에너지신산업연구센터를 비롯해 △배터리시스템시험실을 운영한다.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은 전력망 운영 기술부터 개별 장비 원천기술 개발까지 모두 아우르는 만큼 스마트그리드본부 내 모든 센터의 역량이 집중된다.
스마트그리드본부를 중심으로 KERI는 LS일렉트릭,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일진전기 등 국내 전력기기 대기업과 손잡고 'GW급 대용량 VSC-HVDC 바이폴(Bipole) 변환용 변압기 국산화 개발 과제'를 수행 중이다.
VSC-HVDC 전용 변압기는 높은 전류밀도와 장시간의 고전압 스트레스, 복합 절연 조건을 만족해야 하므로 설계와 제조 난도가 높다. 현재 GW급 VSC-HVDC 바이폴 변압기는 히타치에너지, 지멘스에너지, GE버노바 등 소수의 글로벌 기업이 독점했다.
바이폴 방식은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 두 회로로 구성해 한쪽 극에 장애가 발생해도 단극 운영이 가능하다. 변압기 장애는 대규모 정전이나 산업단지 운영 중단, 계통 불안정 등 국가적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전력 공급의 연속성 유지라는 측면에서 바이폴 방식 적용은 필수다.
송전 용량도 바이폴은 단극 방식과 비교해 약 2배에 달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사고나 혼잡 상황 시 재분배 등 고도의 운영 기능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KERI는 전력변환시스템, 전력기기, 계통해석, 시험평가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기전문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GW급 VSC-HVDC 변압기는 이 네가지 영역을 모두 통합해야 개발할 수 있는 복합 기술이다. KERI는 이러한 융합형 R&D를 수행할 수 있는 구조와 인력, 장비를 모두 갖췄다.
대표적으로 약 200억원을 투입해 지난 2023년 준공한 KERI의 HVDC 시험인프라 구축사업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해외 시험소에서만 할 수 있었던 HVDC 관련 전력기기와 설비 신뢰성, 안전성 시험 평가를 국내에서 수행할 수 있게 되면서 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변압기를 비롯해 AC-DC 전력을 변환하는 컨버터 스테이션을 직접 만든 경험도 있다. 정부 국책 사업으로 효성중공업과 추진한 200MW 양주 VSC-HVDC 국산화 기술 개발, 154·345·765kV 변압기와 차단기 등 국산화 시험 검증, 제주-육지 LCC_HVDC 구축 기술지원, 대용량 인버터 등 전력전자 기반 계통보상 연구, 해상풍력·송전케이블 시험 및 신뢰성 검증 등의 실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에너지 고속도로와 같은 대규모 사업은 참여 기업이나 계통 운영자, 정부 간의 기술 조율이 필수다. KERI는 정부출연 공공 연구기관으로서 기술 기준 수립, 설계 검증, 중립적 평가를 수행해 이해관계자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기술 허브 기능을 맡는다.
◇ HVDC 기술 실증·표준화 국가거점 '우뚝'

KERI는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의 성패가 GW급 VSC-HVDC 컨버터 스테이션 기술 확보에 달려 있다고 본다. 컨버터 스테이션은 HVDC 시스템의 두뇌이자 심장으로 변압기, 변환기, 제어보호장치, 냉각, 절연, 고전압 기기 등 복합 기술의 총체다.
특히 VSC-HVDC는 장거리 지중·해저 송전, 해상풍력 연계, 바이폴 운전, 계통 안정도 제어 등 에너지 고속도로 핵심 기능을 수행하므로 컨버터 스테이션 기술은 국가 기간망 인프라의 최우선 핵심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즉 단순 기자재를 넘어 송전망의 성능과 안정성, 운영주권을 결정하는 전략 기술이다.
KERI는 GW급 VSC-HVDC 컨버터 스테이션을 구성하는 핵심 장치를 실 계통 조건에 가깝게 시험할 수 있는 초고압·대전류 실증 인프라를 구축했다. 해상풍력 및 지중·해저 케이블 연계 조건의 HVDC 시스템을 실증하는 이 인프라는 국내 산업계가 컨버터 스테이션 핵심 기술을 국산화하기 위한 국가 단일 실증 플랫폼이다.
이를 바탕으로 KERI는 국산 컨버터 스테이션 핵심 기술 기술이전 등 상용화를 지원할 방침이다. 국산 장비가 실제 현장에서 요구하는 신뢰성과 내환경성 요구 충족 여부를 실증하고 국제표준(IEC)에 부합하는 성능 규격까지 수립한다는 목표다.
대규모 해상풍력 재생에너지와의 연계 안정성 검증도 빼놓을 수 없다. 일반 연구 기관이나 기업 실험실에서는 수행 불가능한 규모의 시험·검증인 만큼 세계 2위 수준의 시험인증 역량을 갖춘 KERI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국내 HVDC 관련 산업 생태계의 본격적인 확대도 기대된다. 국산 제품의 기술 신뢰성 인증으로 공동 실증에 참여한 기업의 수출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기업도 전문 인력 양성 등 투자에 적극 관심을 보일 전망이다. 향후 아시아, 중동, 동남아 시장에서도 HVDC 수요가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태현 KERI 스마트그리드연구본부장은 “KERI는 GW급 VSC-HVDC 컨버터 스테이션 실증, 검증, 표준화, 기술이전의 국가거점으로서 에너지 고속도로 성공을 위한 핵심 기반 기술을 선도적으로 확보하고 있으며 국내 기업의 자립과 수출 경쟁력을 실현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노동균 기자 defrost@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