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메모리 강국이다. 인공지능(AI) 구현에 필수인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세계 시장 80%를 점유하고 있다. D램을 쌓아 올려 하나의 칩으로 패키징하는 HBM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HBM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 바로 '맞춤형 HBM'이다.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을 구현하기 위해 HBM 가장 밑단(베이스 다이)에 로직 반도체가 탑재된다.
메모리만 잘해서는 HBM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HBM 설계에도 엔비디아와 같은 고객 입김이 세졌다.
제조도 상황이 급변했다. 단순 메모리에서 벗어나 시스템 반도체 제조 역량이 필요해져서다. 외부 파운드리의 개입이 본격화됐다.
HBM4만 하더라도 베이스 다이 제조에 대만 TSMC가 끼어들었다. 이는 HBM 주도권 위협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메모리만으로는 AI 시장 대응이 쉽지 않다. 첨단 패키징과 융합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주영창 한국마이크로전자및패키징학회장(서울대 교수)은 “기존에는 단일 반도체 칩 위주로 접근했다면 이제 시장은 고성능을 구현할 '시스템'을 원한다”면서 “첨단 패키징 기술이 이 같은 시스템 혁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키징이 핵심…D램·낸드 등 전 분야 부상
지금까지 반도체 성능은 주로 전(前) 공정, 즉 회로 미세화가 좌우했다. 그러나 미세 공정 난도가 올라가면서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패키징이 미세공정 한계를 돌파할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서로 다른 반도체(다이)를 쌓고 이어 붙이면서 성능 고도화의 실마리를 찾았다. 반도체 성능을 좌우할 기술 무게 중심이 점차 패키징으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특히 패키징은 AI 인프라 구축의 필수 기술로 떠올랐다. D램을 수직 적층한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HBM과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연결된 AI 가속기도 패키징 없이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이제 누가 더 잘 쌓고 결합하는지가 AI 인프라 최대 경쟁력이 됐다. 전 공정에 뛰 따라 온다는 의미의 '후(後) 공정'이란 말이 무색해졌다.
이는 HBM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낸드플래시에서도 패키징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2월 샌디스크가 깜짝 발표했다. 바로 '고대역폭플래시(High-Bandwidth Flash)'다. 구조는 HBM과 유사하다. HBM은 D램을 쌓아 만들지만, HBF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수직 적층한다.
낸드 플래시와 같은 저장장치는 D램보다 속도가 느리다. HBF는 이런 약점을 보완한 것으로 속도와 용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이 역시 AI 시장을 겨냥한 기술이다. AI 데이터가 폭증하면서 이를 저장할 신개념 저장장치가 필요해졌다.
샌디스크 행보에 업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월 샌디스크와 HBF 기술 표준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올 하반기 샘플을 출시하고, 내년 초 AI 인프라에 탑재하는 것이 목표다. 삼성전자도 내부적으로 HBF 기술을 개발하며 시장 개화에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BF는 패키징 기술로 언제든 AI 메모리 주도권이 뒤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낸드 플래시 5~6위권, 점유율 10%에 불과한 샌디스크가 HBF 하나로 시장을 흔들고 있다. 시장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어느새 뒤따르는 모양새가 됐다.

◇ 첨단 패키징 전폭 투자해야
그나마 메모리 시장에서는 한국 주도권이 견고한 편이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특히 AI 반도체까지 범위를 넓히면 상황은 달라진다. 미국·중국·대만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
AI 반도체 제조는 TSMC가 선두다. 2.5D 패키징(CoWoS) 기술을 앞세워 세계 최대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칩 생산을 사실상 독점했다. AI 반도체 칩 수요가 커지자 최근 TSMC 패키징에 병목 현상도 발생했다. 이에 미국 앰코, 중국 JCET, 대만 ASE 등 외주반도체패키징기업(OSAT)까지 시장에 참가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함께 자체적 AI 반도체 패키징이 가능하지만, 아직 수요가 크지 않다. SK하이닉스도 HBM에서 축적한 패키징 경쟁력을 AI 반도체 패키징까지 확장하려고 시도 중이나 이제 막 시작 단계다.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서 패키징이 소외됐던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메모리 중심 산업에서 패키징 중요성이 떨어져서다. 시대가 바뀐 지금, 기업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인 투자가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김정호 KAIST 교수는 “기존 패키징 요구사항 외 전력 공급, 방열·냉각, 연결(인터커넥트) 등 반도체 칩 성능의 혁신이 이제는 첨단 패키징에서 일어날 것”이라며 “여러 곳에서 패키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투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뿐 아니라 국가적 투자도 시급하다. 패키징 역량을 갖춰야 AI 패권을 쥘 수 있어서다. 특히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하려는 미국은 30억달러(약 4조원)를 투자, 연구개발(R&D)부터 패키징 생산능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역시 2024년 조성한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 3기(빅펀드)' 3440억위안(약 72조원) 중 상당 부분을 패키징에 할애하기로 했다.
한국도 2025년부터 7년간 2744억원을 투자하고 있다. 경쟁국과 견줘 여전히 미약하다. 자칫 패키징 경쟁력 확보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AI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