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칼럼]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때 기술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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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준 중앙대학교 교수(한국전자파학회 JEES 이사)

연구실에서 융합연구를 하다 보면 꼭 사회생활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 든다. 회사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일할 때 서로의 관점을 이해해야 일이 굴러가고 가정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언어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평화가 찾아오듯이, 연구도 마찬가지다. 전자파 연구자와 재료·공정 연구자가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 정말로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만나는 듯한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20년 전쯤, 반도체 공정을 다루는 연구팀과 처음 공동연구를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다른 분야와 처음으로 본격적인 협업을 하던 때였다. 당시 필자는 “이렇게 구조를 만들면 성능이 훨씬 좋아집니다”라며 자신만만하게 설계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상대 연구팀의 첫 반응은 아주 단호했다. “저건 우리 공정 기술로는 못 만들어요.” 마치 누군가에게 “저녁엔 파스타가 좋겠어요”라고 했는데 “우리 집엔 냄비도 없어요”라고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최적인 구조가 실제로는 재료·장비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후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며 그럼 공정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지, 대신 성능은 어떻게 되는지와 같은 대화를 오갔다. 서로의 기준을 맞춰가며 조율하던 과정 끝에, 완벽한 구조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만들 수 있으면서도 충분한 성능이 나오는 '현실적 해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과정은 기술 논쟁이라기보다 일종의 전문가 간의 통역 작업에 가까웠다. 서로의 언어를 번역해 주면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고, 오히려 그 지점에서 더 창의적인 설계가 나오기도 했다.

최근 다른 분야의 국제학술대회에 가면 더 흥미로운 장면도 자주 본다. 전파 분야에서는 오래 전부터 써오던 메타표면이라는 기술을 컴퓨터 분야 연구자들이 '혁신적인 모바일 네트워크 아이디어'라며 발표한 사례를 본 적이 있었다. 또 통신 분야에서 최근 각광받는 '재구성지능표면(RIS)' 기술도, 사실 전파 분야에서 오래 전부터 연구돼 온 반사배열 안테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분야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기술이 '신기술'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가 다른 모임에서 갑자기 인기 스타가 되어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사례들은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우리 분야에서는 난제처럼 보이는 문제가, 다른 분야에서는 이미 해결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자파 연구자가 높은 전기적 손실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재료 연구자는 “이건 그냥 조성을 이렇게 바꾸고 소결 온도를 조금만 올리면 됩니다”라고 태연히 말하기도 한다. 제조공정 전문가에게는 하루 만에 조정 가능한 변수일 때도 있다. 전자파 연구자는 전기적 특성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재료 연구자는 미세구조·조성·결정 구조·공정 조건을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결국 융합연구의 핵심은 기술 자체보다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맞추는 능력에 더 가깝다. 사회가 조화를 이루려면 구성원들의 배경을 인정해야 하듯, 연구도 서로의 기준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다. 전자파 연구자에게는 0.1이라는 수치가 엄청난 차이지만, 공정 연구자에게는 “장비 오차보다 작은데요”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반대로 공정팀이 자랑스럽게 “선폭 편차가 오차범위 5% 이내면 매우 우수한 균일성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전자파 팀 입장에서는 “선폭이 5%만 달라져도 공진 주파수가 수백㎒ 이동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라는 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이런 간극을 좁히기 위해 서로의 실험 데이터를 함께 들여다보고, 시뮬레이션과 공정 로그를 나란히 비교하며 하나씩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설계 방식이나 공정 조건이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제 기술 개발은 더 이상 한 분야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파, 재료, 공정, 기계, 인공지능(AI)이 모두 얽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시대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때로는 한 발 양보하며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그 자체가 융합연구의 경쟁력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사회생활과도 닮아 있다. 결국 기술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성준 중앙대 교수·한국전자파학회 JEES 이사 sungjoon@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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