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의류 소재에 머물렀던 섬유가 이제는 친환경 및 첨단기술과의 융합을 통해 국가 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주역으로 거듭났습니다. 반도체, 모빌리티, 헬스케어, 국방, 우주항공 등 첨단산업의 성장을 든든히 뒷받침하는 필수 소재이자, 미래의 핵심 산업으로 비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섬유산업이 선진국의 기술 패권과 후발국의 저가 공세 사이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며 새로운 성장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섬유를 '사양산업'이라 부르지 않는다.

1987년 11월 11일, 단일 업종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린 그날. 이후 11월 11일은 '섬유의 날'로 제정되었고, 38년이 흐른 지난달 기념식에서 산업훈장을 받은 기업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첨단 기술을 입은 K-섬유는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고.
국내 유일의 섬유생산 전문기술연구소인 한국섬유개발연구원(KTDI)의 김성만 원장을 만나, 우리 섬유산업의 현주소와 K-섬유패션이 나아갈 길, 그리고 이를 위한 KTDI의 치열한 연구개발(R&D)과 기업 지원 노력에 대해 들어봤다.
▲KTDI 주요R&D성과를 꼽는다면=섬유산업은 지금 로봇, 헬스케어, 모빌리티 등 미래 신산업과 만나 놀라운 시너지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로봇 기술과 융합한 '소프트 웨어러블 로봇용 인공근육 섬유'다. 형상기억합금 코일 섬유를 활용해 인간의 근육처럼 수축과 이완이 가능한 옷감 형태의 인공근육을 만들어낸 것이다. 유연하면서도 소음이 없는 이 기술은 근로자나 근골격계 환자의 신체 활동을 돕는 든든한 보조자가 되어준다.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스텐트용 메디컬 섬유'가 돋보인다. 작년 세계 최초로 다중층 약물 방출 기능을 갖춘 소화기계 스텐트용 섬유를 개발했다. 체내에서 일정 기간 팽창력을 유지하다가 서서히 녹아 없어지기 때문에, 스텐트 제거를 위한 재수술의 고통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모빌리티 분야 역시 가볍지만 강철보다 강한 섬유강화 복합소재를 통해 UAM(도심항공교통)과 전기차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 지난 6월에는 국립창원대학교와 손잡고 첨단 섬유 소재의 영토를 우주·항공 분야로 넓혀 국산화와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건레더 등 친환경 소재 관련 연구성과가 있다면=비건레더는 동물 윤리와 환경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우리는 버섯 재배 후 버려지는 부산물 등 다양한 바이오매스 원료를 재활용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이를 위해 지난 10월 충남 부여군에 '바이오소재융합기술센터'의 첫 삽을 떴으며, 이곳을 비건레더 실증과 사업화의 전초기지로 키워나갈 계획이다.
또 식물성 오일을 활용한 100% 바이오 기반 지방족 폴리에스터를 비롯해, 흙과 바다에서 각각 분해되는 PLA(옥수수 전분 소재), PHA(미생물 유래 소재) 섬유를 개발해 기업과 함께 상용화를 서두르고 있다.

이 외에도 헌 옷을 화학적으로 분해해 다시 새 옷으로 만드는 'F2F(Fiber to Fiber)' 기술, 폐어망과 페트병을 물리적으로 재활용하는 연구도 활발하다. 이는 미세플라스틱과 해양 폐기물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날로 강화되는 글로벌 환경 규제라는 파고를 넘는 핵심 키가 될 것이다.
▲섬유산업 DX·AX를 위한 KTDI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섬유는 전통 제조업'이라는 낡은 인식과 달리, 실제 현장에서는 DX(디지털 전환)와 AI(인공지능)를 수혈해 체질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KTDI는 가상 공간에서 원단을 설계하고 의류까지 구현해보는 '메타패브릭 시스템'과 로봇 자동화 기술로 다품종 소량 생산을 가능케 하는 '마이크로팩토리' 구축을 통해 산업의 디지털화를 이끌고 있다. 내년 말 인프라가 완성되면 기업들은 생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시장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국내 최초의 AI 기반 기술 자문 서비스인 'TEX-AI'는 주목할 만하다. 숙련공의 은퇴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현장 노하우를 AI가 학습해, 누구나 쉽게 전문 지식을 활용하고 현장의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기업들을 위해 어떤 지원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나=KTDI의 존재 이유는 바로 '기업'이다. R&D부터 시제품 제작, 시험 분석, 기술 사업화까지 원스톱으로 지원한다.
친환경소재개발센터에서는 40여 대의 전문 장비를 통해 기업이 원하는 차별화된 소재 시제품을 만들어주며, 슈퍼섬유개발센터는 탄소·아라미드 섬유를 활용한 복합재 개발을 돕는다. 또한 KOLAS 인증을 받은 시험분석평가센터는 180대에 달하는 장비로 소재의 물성과 유해 물질을 정밀 분석해준다.
국방·소방복을 테스트하는 화염 마네킹(작전환경적용실증센터)이나 산업용 필터를 검증하는 집진필터실증센터(영천분원) 등 특화된 시설도 갖췄다. 산업통상자원부 지정 기술거래기관으로서 특허 기술 이전과 컨설팅을 통해 기업의 기술이 시장에서 빛을 볼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도 수행 중이다.

▲미래를 이끌 인력 양성 계획은=결국 사람이 경쟁력이다. KTDI는 재직자와 학생, 석·박사급 인재들이 친환경, AI, DX 등 최신 트렌드로 무장할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을 제공한다.
특히 투자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위해 'AI·DX 융합형 실무인재'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섬유 기초 지식 위에 데이터와 디지털 역량을 덧입히는 과정이다. 경북대, 영남대 등과 협력해 메타패션, 디지털 트윈 공정 등을 교육하고 있으며, 2029년까지 270명 이상의 전문 인력을 키워 그중 75% 이상을 업계로 배출하겠다는 목표다.
▲끝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섬유산업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뿌리였다. 70년대 수출의 30%를 책임졌고, 수십 년간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이며 경제 발전의 젖줄 역할을 했다.
이제 섬유는 단순한 의류를 넘어 첨단산업의 심장부로 들어왔다. 반도체, 우주항공, 모빌리티 등 미래 산업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고기능성 섬유 소재가 필수적이다. 섬유산업이 첨단산업 강국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후방의 거인'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정부의 따뜻한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이 대다수인 섬유산업의 특성상,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는 급변하는 파도에 맞서기 어렵다. 전문생산기술연구소인 KTDI가 그 곁을 지키겠다. 기업의 기술 혁신을 돕고 미래 먹거리를 함께 발굴하며, 섬유산업의 르네상스를 여는 든든한 동반자가 될 것을 약속드린다.
대구=정재훈 기자 jhoon@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