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 접어든 1989년 6월 1일. 청와대 경내는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각계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과학기술진흥회의를 설치, 운영하겠습니다.”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은 이날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처 주요 현안에 대한 업무를 보고했다.
이날 보고 핵심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과학기술진흥회의 신설이었다.
이 장관은 “새롭게 발족할 대통령과학기술자문회의와 별도로 과학계와 산업계, 정치계, 학계 등 각계 인사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기 위한 과학기술진흥회의를 설치, 운영하고자 합니다. 이 회의는 각하께서 주재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좋습니다. 회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오.”
이 장관은 현안 보고를 계속했다.
“과학기술처는 초·중·고생이 참여하는 한국우주청소년단을 이른 시일 안에 창단하겠습니다. 청소년들에게 미래 우주과학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관계부처와 협의해 항공우주연구소도 연내 설립하겠습니다.”
이 장관은 이어 “세계 이상기후 현상으로 우리나라도 가뭄과 홍수, 이상 고온과 저온 현상, 그리고 태풍 등이 몰아칠 것으로 예상해 기상대를 중심으로 재해 예방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날 현안 보고 중 항공우주연구소 설립은 우주강국을 향한 도전이고 재해 예방은 오늘날 발등의 불이 된 기후위기에 대비한 미래 포석이었다.
이상희 장관의 말. “21세기 최대 자원은 기술력이다. 기술의 가치를 모르면 결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없다. 과학기술이 국가 부흥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는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과학두뇌가 희망이다)
과학기술처 당시 고위 인사의 말. “5공때 대통령이 주재했던 기술진흥확대회의는 5공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뒷빋침하는 주력 엔진이었습니다. 6공이 이 회의를 중단하자 과학기술계의 불만이 상당했어요. 이를 잘 아는 이상희 장관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과학기술진흥회의를 설치, 운영키로 한 것입니다.”
6월 27일 청와대 영빈관. 노태우 정부의 과학기술진흥에 대한 과학기술계 기대 속에 제1회 과학기술진흥회의가 이날 오전 노태우 대통령 주재로 열렸다.
회의에는 강영훈 국무총리를 비롯해 각 부처 장관, 유준상 국회경제과학위원장, 유창순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박태원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장, 조완규 서울대 총장 등 학계, 연구계, 산업계, 경제계, 언론계 대표 등 181명이 참석했다.
이날 오전 9시 30분. “대통령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강영훈 국무총리와 조순 경제부총리,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 등과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노태우 대통령 오른쪽에 강영훈 국무총리가, 그리고 대통령 왼쪽에는 조순 경제부총리와 이상희 장관이 자리를 잡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첫 진흥회의에서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발전이 어렵고 민주주의 성장이나 국민복지 증진도 이룩할 수 없다”며 “산업계와 학계, 연구계가 모두 과학기술 진흥에 각별히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투자를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도 규모가 크게 뒤떨어지는 형편”이라며 “앞으로 과학기술 투자를 국민총생산액(GNP) 대비 5% 수준까지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정부는 선진국보다 낙후한 기초과학 육성과 첨단기술 개발을 위해 각종 지원책을 강구해 나가겠다”면서 “국민은 과학기술을 생활화하고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도 과학기술을 바탕에 둔 사고와 업무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기술개발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기업”이라며 “기업은 기술개발 투자와 인력양성 등 기술우위 경영전략을 추진해 첨단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정부도 기업의 창의적 활동에 방해가 되는 불필요한 법령이나 제도를 꾸준히 개선해 나갈 것이며 대학과 연구기관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데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진흥회의는 김경동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주제 발표와 과학기술처가 '과학기술 미래, 그리고 우리 국토'에 대해 슬라이드로 보고했다. 이어 참가들의 자유토론 순으로 진행했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을 주축으로 한 국가발전전략'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첨단과학기술이 무기화하는 국제화 시대에 우리 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과학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뿐”이라며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 정부가 모두 일관성있게 과학기술 혁신과 극대화에 힘을 모아 과학기술진흥 체계를 구축하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부와 기업은 과학기술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과학기술 직업에 대한 사회 경시 풍조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상희 장관 사회로 각계 대표들이 자유토론을 했다. 각계 대표들은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국책연구사업 확대 △기초과학 활성화 △GNP 대비 5% 과학기술 투자 △과학기술진흥기금 설치 △국민 과학화 운동 전개 △전 국토의 기술지대망 조속 추진 △과학기술행정기관 위상 강화 △기업의 기술우위 철학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그해 9월 23일. 한국우주청소년단(현 한국과학우주청소년단) 발대식이 서울 올림픽 공원 내 올림픽 문회센터에서 열렸다. 한국우주소년단 창단은 미국과 소련 일본 등에 이어 세계 6번째였다.
발대식에는 노태우 대통령과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 2800여명의 청소년 단원, 학부모, 지도교사 등 370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제미니 9호와 아폴로 19호에 탑승했던 미국인 우주비행사 유진 서넌, 소유즈 19호에 탑승했던 소련 우주비생사 비탈리 세바스키아노트 등이 참석해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치사를 통해 “우주시대에 대비해 정부는 연내 한국항공우주연구소를 설립하고 관련 산업육성을 위해 항공우주산업개발촉진법을 곧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한국우주소년단은 우리나라가 21세기 세계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선도적인 청소년단체가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정부는 1990년대 중반에는 통신방송 위성과 과학위성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우주소년단은 이날 노태우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위촉했다.
다음달인 10월 11일. 한국항공우주연구소(현 한국항공우주연구원)가 이날 오전 11시 대덕연구단지에서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과 김훈철 한국기계연구소장, 학계, 연구계 ,산업계 인사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판식을 갖고 출범했다.
한국기계연구소 부설로 출범한 연구소는 그동안 기계연구소와 천문우주과학연구소의 기존 항공우주 기술인력을 통합해 45명으로 업무를 시작했고 1993년까지 460명 규모로 인력을 확충키로 했다. 연구소는 항공우주 분야 기초 핵심기술 연구와 산업체 기술지원, 정부 기술정책 지원 등 첨단 항공우주 기술 구심체 역할을 담당키로 했다.
초대 연구소 소장에는 재미과학자인 황보한 박사를 선임했다. 황보한 소장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코네티컷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위성제작회사인 페어차일드 스페이스사와 응용위성 감리기관인 MRJ사 등 항공우주 분야에서 오랜 연구를 했다. 황보한 박사는 연구소장에서 물러난후 KT 위성운용단장으로 한국 최초 상업용 위성인 무궁화 위성 1·2·3호 발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우주연구소는 1996년 11월 22일 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이어 2001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개칭했다. 현재 원장은 연구원 부원장과 달탐사사업단장을 역임한 이상률 박사다. 그는 항공우주연구 외길을 걸어온 국내 우주개발 1세대다. 연구원은 이후 한국이 우주 강국으로 도약하는데 중추 역할을 해왔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