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투자시장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코로나19 당시 광풍을 기록했던 벤처투자 거품이 꺼졌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코로나19 당시인 2021~2022년을 제외하면 중장기 성장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지만, 업계는 투자 심리가 위축되며 민간 주도 벤처투자 생태계 구축이란 정부 전략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향후 전망 역시 예단하기 어렵다는 관측한다. 정부 정책금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벤처투자 육성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기로에 선 韓 벤처투자…“시기적으로 안정화 국면, 정책금융 마중물 역할에 기댈 뿐”
중기부는 20일 '2023년 국내 벤처투자 및 펀드결성 동향'을 발표하고 지난해 국내 신규 벤처투자 규모가 10조9133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조4706억원과 비교하면 12.48% 감소했다. 금액 기준으로는 1조5573억원이 빠졌다. 최근 5년 새 최대 15조9371억원(2021년)까지 증가했던 벤처투자액과 비교하면 5조원 넘게 축소됐다. 지난해 벤처투자 건수는 전년 대비 354건 줄어든 7116건이며, 4026개 기업(중복 포함)에 투자가 집행됐다.
중기부는 벤처투자 혹한기에 나름 선방했다는 분위기다. 2008년 이후 투자가 연평균 16% 늘면서 중장기 성장 추세를 유지하고 있고, 2020년과 비교하면 35%가량 증가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코로나19 기간 광풍을 기록했던 시기만 제외하면 중기부 설명대로 국내 벤처투자 시장은 성장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연간 펀드결성액은 12조7627억원으로 코로나19 이전 최고치(2020년, 9조9853억원)보다 28% 증가했다. 중기부는 전년(17조6603억원) 대비로는 28% 줄었으나, 2008년(1조1000억원) 이후 연평균 18% 늘면서 중장기 성장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기부는 글로벌 시장 대비 회복세가 뚜렷하다고도 분석했다. 실제 달러 환산 시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코로나19 이전(2020년)보다 22% 증가했지만, 미국(1%↓)·유럽(4%↑) 등은 2020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국내는 물론 해외 정세를 볼 때 상황 자체가 불안정한 측면이 있어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지표상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주변 여건이 갑자기 나빠지거나 악화하지 않으면 조금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시장이 급변했다는 점이다. 업종별 선호하는 벤처투자 형태가 변했다. 코로나19 당시 유동성이 확대되면서 바이오·의료 업종과 정보통신기술(ICT)서비스 등 언택트 분야를 비롯해 유통 투자가 크게 늘었지만 지난해 10%에서 많게는 40% 이상 해당 분야 벤처투자가 급감했다. 반면 딥테크, 반도체 등에 관심이 쏠리면서 ICT제조, 전기·기계·장비 등 업종에 투자가 집중됐다. 지난해 ICT제조는 62.7%, 전기·기계·장비 업종은 39.7% 신규투자가 증가했다. 금액 기준 5272억원, 4288억원 각각 늘었다.
업계 관계자는 “딥테크와 반도체 분야가 워낙 성장성이 높아 벤처투자 시장에서 최근 각광받고 있다”면서 “유동성이 확대된 시기 바이오 업종과 ICT서비스 등에 편중됐던 투자 대상이 조금 더 성장세가 높은 대상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기 기업에 지나치게 편중된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 지난해 업력 7년 초과 후기 기업은 신규투자액 5조1616억원으로 전년 대비 6.9% 증가한 반면 3년 이하 초기 기업과 3~7년 사이 중기 기업은 신규투자액이 각각 20.2%, 28.3% 감소했다. 금액으로는 6786억원, 1조2119억원 각각 줄었다.
중기부도 관련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중기부 관계자는 “최근 시장 경색으로 가급적 회수가 더 빠른 곳에 투자하는 경향이 반영되면서 후기 기업에 집중된 문제가 있었다”면서 “내부에서도 후기 기업에 최근 벤처투자가 편중된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초기·중기 기업에 대한 정책금융을 확대하기 위해 모태·스케일업 펀드 등으로 사각지대가 없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자심리 위축에 직격탄 맞은 민간 주도…정부 정책금융 확대로 새판 짜야
변화한 시장 상황에 따라 기존 벤처투자 육성 전략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미 정부가 추진한 민간 주도 벤처투자 생태계 조성에는 비상이 걸렸다. 민간 부문 투자 심리가 위축되면서 이미 정부 전략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중기부가 발표한 지난해 벤처투자 현황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부 민간 주도 벤처투자 생태계 조성 전략에 따라 2021년 3조4045억원을 기록했던 정책금융은 2022년 3조1851억원으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민간 부문은 14조3995억원에서 14조4752억원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이 추세는 잠시였다. 지난해 정책금융은 2조1284억원으로 전년 대비 33.2% 크게 감소했다. 정부 주도 벤처투자를 민간으로 넘겨주려는 정부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다만 민간 부문 투자 심리가 악화하면서 민간 부문이 10조6343억원으로 전년 대비 26.5%나 줄었다. 정부 의도가 빗나간 것이다.
따라서 업계는 민간이 아닌 정부가 나서 과감한 벤처투자 육성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정부는 민간 부문 투자 부진에 따라 최근 정책금융을 확대하고 있다. 이미 중기부가 모태펀드 출자예산(9100억원) 전액을 1분기 이내에 출자하기로 했고, 민·관이 함께 조성하는 '스타트업코리아펀드'도 민간 출자자 의견수렴 및 구체적인 출자 협의를 조속하게 진행한다. 아울러 모태펀드 '글로벌펀드 출자사업'에서 외국 벤처캐피털(VC)과 공동으로 운용하는 자펀드 비중도 확대한다.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등 여파로 업황이 힘들면 정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게 맞지만, 정부는 민간 자금을 가져온다고 정책금융은 줄인 상황”이라면서 “하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민간 투자가 경색되면서 전체 시장이 얼어붙은 결과가 초래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모태펀드 등 과감한 지원으로 연내 혹한기가 가실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오는 만큼 정부 주도 벤처투자 육성 전략을 새롭게 수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박윤호 기자 yun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