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능력 5% 초과 증설 금지
현지 시장 맞춤 전략 발굴해야
“현상 유지만 하라는 메시지다. 생산 전략 변경 등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자국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기업의 중국 내 생산능력을 5% 초과 증설하지 못하도록 하는 '반도체법 가드레일'을 최종 확정했다. 중국에서 반도체를 생산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영향권에 드는 법으로, 국내 업계가 요구한 증설 기준 완화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앞으로 중국 내 첨단 기술 투자와 생산능력 확대가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생산 전략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 업계는 말을 아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5% 초과 증설 금지 확정
미국 상무부는 22일(현지시간) 반도체 지원법 가드레일 최종 규정을 공개했다. 미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중국 등 안보 우려 국가에서 허용치 이상으로 반도체 생산능력을 확장할 경우 보조금을 반환하는 것이 골자다.
미 정부는 당초 예고했던 기준을 고수했다. 첨단 반도체의 경우 10년 간 (웨이퍼 기준) 5% 초과 증설을 금지했다. 5% 이하는 늘릴 수 있다. 또 28나노 이상 범용(레거시) 반도체는 10% 이상을 금지했다. 10% 미만까지는 증설이 허용된다. 다만 범용 설비에서 생산된 반도체 85%가 중국 내 최종 제품으로 활용되면 확장에 제한이 없다.
앞서 우리나라 기업과 정부가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량을 기존의 두배인 10%까지 확장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이는 수용되지 않았다.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고립시켜 중국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려는 미국 의지가 재확인된 것이다.
◇팹 유지는 할 수 있겠지만...
미국의 가드레일 확정에 국내 반도체 업계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별도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다만,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세부 규정 검토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전제하면서도 “중국 내 대규모 증설이 어려운 분위기에서 가드레일 분석을 토대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냐”고 전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 최종안이 확정되자 보도 참고자료를 내고 “안보적 우려가 없는 (우리 기업의) 정상 경영활동은 보장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평가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현상 유지는 할 수 있겠으나 앞으로 중국에 첨단 기술이나 대규모 투자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미국이 확정한 가드레일은) 국내 기업에 중국 공장은 지금 있는 정도만 현상 유지만 하라는 메시지”라며 “대(對)중국 투자를 자제하고 첨단 반도체 생산은 안된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이어 “미국이 강경 일변도 규제 방침을 확고히 한 것으로 양국 패권싸움이 계속되는 한 기조는 달라지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반도체는 첨단 공정 투자와 증설에 따라 경쟁력이 달라지는데, 국내 업계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5% 이하로 묶어 놨으니 사업 활동에 제약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다.
강사윤 한국마이크로전자및패키징학회장도 “향후 중국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건 사실상 가로막혔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앞으로 중국 공장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내수 시장에 맞춘 탈바꿈 전략도 가능하다”며 “가령 중국 전기차 시장이 커지고 있는데 여기에 맞춘 전력 반도체 공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7나노 미만과 같은 첨단 반도체 아닌 범용 반도체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중국 내수 시장을 적극 공략하면 미국의 확장 제한을 우회, 사업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 첨단 장비 반입 유예는 어떻게
가드레일과 별개로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도 잠재적 위험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자국 장비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1년 한시적으로 규제를 유예했으나 아직 연장 여부는 결정되지 않고 있다. 유예는 다음달로 끝난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양국 갈등이 심화되면 미국발 반도체 장비 규제가 확대되거나 중국발 새로운 규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며 “삼성·SK하이닉스 모두 중국 공장은 현지 수요 맞춤형 생산라인으로 가동하고 첨단 반도체는 국내 신규 공장에서 생산하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공장에서 전체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공장과 다롄공장에서 전체 D램의 40%와 낸드 20%를 각각 생산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면 이들 공장을 운영하는데 가드레일 규정 제한을 받는다.
보조금을 받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내 투자를 추진하고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 TSMC가 미 정부 보조금을 받는데, 삼성전자가 받지 않는다면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박종진 기자 truth@etnews.com, 권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