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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삭스와 애플이 협력한 애플 통장이 3개월 만에 예금액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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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과 골드만삭스가 올 4월 내놓은 애플통장이 3개월 만에 예금액 100억달러(13조원)을 돌파했다. 골드만삭스가 이자를 대고 애플이 애플카드 사용자에게 결제액에 따른 포인트를 쌓아주는 이 통장은 금융사와 IT업체가 만든 혁신 금융상품으로 평가 받는다.

사실 이런 협력은 국내에서 먼저 시작됐다. 네이버파이낸셜과 하나은행이 지난해 11월 선보인 '네이버페이머니하나통장'이 그 주인공이다. 애플통장과 네이버페이머니하나통장은 IT업체와 금융사가 손 잡고 내놓은 혁신 상품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이를 가능케하는 양국의 법과 제도는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내 법상 은행만 통장을 소개하고 판매할 수 있다.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은 예적금상품 판매대리 중개를 명시하긴 했지만, 중개 라이선스를 받기 위한 조건과 방식 등은 법으로 정해놓지 않았다. 국내 규제를 애플통장에 적용하면 애플은 애플통장을 판매·소개할 수 없다. 반면, 미국은 각 주별 금융 관련 법에 근거하여 금융상품 중개업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애플 같은 IT회사가 금융상품을 전개하는데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로 네이버페이머니하나통장은 출시 당시부터 금융당국으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받아야 했다. 2년 한시적 판매, 신규 모집계좌 한정 등 여러 규제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 소비자들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는 상품이 금융권으로 확산되거나 제도화 되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네이버페이머니하나 통장이 애플통장보다 먼저 출시됐지만, '한국판 애플통장'이라는 다소 마이너한 타이틀을 얻은 것은, 금융 혁신에서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 기득권 방어에 안주하는 디지털 정책...'일본보다도 못 해'

디지털 확산을 위해 각 분야에서 현실을 반영한 전용 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수십년 된 관련법을 개·보수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아예 판을 새로 짜자는 이야기다.

앞서 예로 든 금융 분야에서는 생겨난지 최소 20년 가까이 된 금융지주회사법, 전자금융거래법이 여전히 금융과 핀테크 업권을 규제하고 있다. 여기에 금소법처럼 새로 생긴 제도도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기존 금융산업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혁신이 싹이 틔워지더라도 바로 꺽여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융플랫폼이다. 2021년 금소법 시행에 따라 플랫폼이 대출을 제외한 금융 상품을 중개하는 행위가 금지됐다. 당시 보험 비교 서비스를 운영 중이던 카카오페이, 토스는 관련 서비스를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보험비교플랫폼은 금융당국 혁신서비스 지정을 통해 2024년 초에나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금융 분야만 한정해 놓고 보면 주요 나라는 우리나라 같은 규제를 푸는 중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금융서비스 중개' 제도를 마련해 불필요한 규제가 없앴다. 디지털화에 늦은 것으로 평가 받는 일본마저도 2021년부터 '금융서비스 중개업'을 제도로 정착시켜 핀테크와 금융사 간 협력을 통한 금융 경쟁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금융서비스 중개업은 은행, 보험, 증권 등 각 금융상품 중개 라이센스를 하나로 통합해 플랫폼이 이를 운영케 하는 것이 골자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일본) 금융사들은 판매를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보고, 특히 젊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핀테크 기업들과 협력을 모색 중”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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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7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은행권 경영ㆍ영업 관행ㆍ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2023.7.5 hkmpooh@yna.co.kr

우리나라도 금융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구호에 그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을 비롯한 정부 당국 은행 과점체제 비판으로 시작된 금융위 '은행 영업관행 개선 TF'는 기존 논의를 반복하며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마무리 됐다. 인터넷은행 추가 승인, 챌린저은행 도입은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다는 비판도 나왔다.

핀테크 업계 관계자는 “각종 규제가 체계적인 법률로 명시되어 시행되지 않는 점이 오히려 소비자 보호 등 총체적 관리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면서 “단지 핀테크업 성장을 지원하자는 측면만이 아닌, 금융 중개 도입에 따른 영향이나 리스크를 제대로 컨트롤하기 위해서라도 핀테크 전용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대출, 예적금, 보험, 증권 등에 대한 금융서비스 중개 라이선스도 만들고 이를 규제하는 전용 법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예·적금 등 은행 금융상품들도 소비자가 손쉽게 비교하고 따져보며 경쟁력있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은행도 현재 영업관행에 안주하지 않고 금융상품 혁신과 금리경쟁 등을 시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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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국가 금융서비스 중개제도 현황. 출처: 업계·한국금융연구원

◇ “비대면진료에 플랫폼 왜 필요하나”...중앙정부 권력 놓고, 입법부 인식 바꿔야

낡은 제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금융권 이야기만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한시 허용돼 의료 시스템 일부를 담당했던 비대면진료가 고사 위기에 빠진 것도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한 법 때문이다.

국회에 비대면진료를 제도화하는 법안이 쌓여있지만, 대부분 약 배송을 불허하고 재진, 만성질환자 위주로 비대면진료 범위를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다. 의사회, 약사회 등 기득권 협단체 입김이 강하게 반영돼, 여야를 막론하고 '진흥법'이 아니라 '금지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법안심사 과정에서 “(비대면진료에) 플랫폼이 왜 필요하냐”는 약사 출신 한 야당의원의 발언은 이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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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진료 시범사업이 종료됐지만, 플랫폼 업체와 의·약 협단체 간 이견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코리아스타트업포럼과 국회 스타트업 연구모임 '유니콘팜'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공동 진행한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의·약 협단체 기득권과 입법부 인식은 현장 여론과도 동떨어져 있다.

해당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참여한 의사 81%는 비대면 진료 시행 기준을 완화해 초진을 포함해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초진 등을 사실상 금지한 현재 시범사업대로 제도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사 비율은 82%였다. 시범사업 형태가 '환자가 쉽게 진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고 생각하는 비율도 73%였다. 약사 71%, 환자 49.4% 역시 비대면 진료 대상이 되는 환자 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비대면진료업체 한 대표는 “일부 이익단체가 여론을 호도하고 기득권 출신 의원들이 호응하며 소비자에게 갈 편익이 사라질 위기”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2년이 넘는 논의가 공전한 탓에 비대면진료는 국내에서 산업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원격의료산업협의회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비대면진료가 막힌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스타트업으로 주목받았던 비대면진료 업체들은 사업을 접거나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서로 다른 각 국 의료 환경을 고려하더라도 글로벌 트렌드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문가 집단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 할 방안으로 중앙정부 권력을 지방자치단체에 나누고, 새로운 법 체계를 갖추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윤석열 정부 경제 규제혁신 TF(태스크포스) 민간위원으로 활동 중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미국 등 선진국과 우리나라 규제 상황의 가장 큰 차이는 중앙정부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라면서 “중앙 행정부가 규제로 산업을 통제하는 방식에서는 양 쪽 기득권 중심으로 법이 작동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필요에 따라 각종 혁신 서비스를 도입할 수 있게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다. 예를 들어 병원이나 운송수단이 부족한 지방에서는 적극적으로 비대면진료를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 변호사는 “이는 인구·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기존 법으로 해석하거나 수선하는 방식의 규제 개선도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업계 주장에도 동의했다. 더 나아가 각 부처가 현재 아날로그식 규제를 전수조사해 이를 디지털 환경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내놨다.


구 변호사는 “정권을 막론하고 정부가 혁신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면서 “혁신 서비스가 나오면 기존 법을 확장하거나 유추해석 하지 말고, 아예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새 법을 제정하는 동안 마켓이 열리고 혁신기업이 다수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시소 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