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6일 미국 트럼프 정부가 340억달러(약 44조3900억원) 규모 중국 상품 818개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 때 시작된 미·중 무역 갈등은 5년이 지난 현재도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양측의 갈등은 글로벌 인플레이션 심화 속 자국 이익 극대화 목적을 넘어 미래 경제 패권 확보를 위한 기술안보 전략까지 결합하며 더욱 치열하고 장기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우리나라 반도체, 배터리 등 제조업계는 두 나라의 패권 다툼 혼란 속에서도 실리 추구를 위해 다양한 전략을 취했다. 미·중 무역전쟁 장기화 전망 속에서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는 신규 전략 발굴과 공급망 다각화 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중 갈등은 세계 반도체 산업을 뒤흔들 만큼 여파가 만만치 않다. '반도체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반도체가 국가 안보 전략 핵심 산업으로 급부상하면서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대만, 일본, 유럽, 한국까지 자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나라는 중국 내 반도체 사업 불확실성이 커졌다. 미국이 중국을 안보 '우려국' 대상에 포함하면서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따라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중국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를 제한받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서 생산하는 D램과 낸드 플래시 메모리 비중이 상당해 향후 사업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중국 생산 비중을 점진적으로 낮추고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는 전략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이 자국을 포함, 일본·네덜란드 등 주요 동맹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역시 제한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 실현은 늦어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 네덜란드의 핵심 장비 없이는 첨단 장비 제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새로운 공급망을 발굴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눈을 돌리고 있다. 국내 반도체 장비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장비를 납품한 경험과 기술력을 확보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 장비를 도입해서라도 첨단 반도체 장비를 제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실제 국내 반도체 장비사들의 대(對)중국 수출도 미·중 갈등 이후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중국이 갈륨·게르마늄 등 차세대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을 걸면서 미·중 갈등으로 인한 반도체 산업 영향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이 자국 내 생산 비중이 높은 희귀 금속을 쥐고 세계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을 잡으려고 할 경우 미국과의 마찰은 심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수출 제한도 미국의 중국 견제에 따른 맞대응이라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배터리 분야는 미·중 무역 갈등의 수혜를 보는 분야로 꼽힌다. 미·중 무역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키워드로 '탈중국'이 떠오르면서 그 대체재로 우리나라 배터리 기업에는 기회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중국은 '신에너지차 권장 목록' 같은 제도를 통해 사실상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차별 전략으로 자국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을 키워왔다. 한국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는 보조금 지급에서 배제되면서 우리 배터리 제조사들은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세계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배터리 기업 공세에도 대응해야 했다.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시행되면서 우리 기업들은 고속 성장 기회를 얻게 됐다. 중국 경쟁업체가 미국에 진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K-배터리 3사를 향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러브콜이 잇따른다. 우리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내 단독 공장과 합작 공장을 설립하며 현지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기업들도 원재료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IRA에서 규정하는 외국 우려 단체에 중국 기업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2025년까지 중국에서 조달하는 핵심 광물 비중을 줄여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최근 국내 배터리 기업이 조달처를 다변화하고는 있지만 배터리 핵심 원료인 코발트, 리튬, 흑연 등 핵심 광물 수급에 있어 아직 중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바이든 행정부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정책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우리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이 효과적으로 공급망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가전과 모바일, 자동차 등 우리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영역도 미·중 갈등 영향을 피할 순 없었다. 반도체, 배터리 등과 비교해 영향은 적었지만 2016년 한한령을 시작으로 중국 내 한국기업의 노골적인 견제와 함께 무역 전쟁 발발, 코로나19유행 등이 겹치면서 '탈(脫) 중국' 바람이 불기도 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2018년 말 톈진 스마트폰 공장을 시작으로 2020년 광둥성 후이저우 스마트폰 공장, 쑤저우 PC 공장, 톈진 TV 공장 생산을 중단했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쑤저우 LCD 공장을 중국 2위 업체인 CSOT에 매각했다. 대부분 중국에서 벗어나 인도, 베트남 등으로 공급망에 변화를 줬다.
LG전자는 2021년 중국 톈진 히터 부품 생산법인과 쿤산 인포테인먼트 생산법인, 오프라인 유통 매장 1곳을 청산했다. 특히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부품 생산은 베트남 하이퐁 생산법인에 맡겨 일원화했다. 현대자동차 역시 2021년 베이징 1공장을 매각한 데 이어 창저우 4공장과 충징 5공장을 올해 추가로 매각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5년간 미·중 갈등이 촉발한 공급망 재편, 현지 사업전략 변화는 매출 구조까지 바꿨다. 상대적으로 현지 사업화가 뿌리를 내린 미국 의존도가 높아진 반면 중국 시장 성과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미·중 무역 전쟁 발발 전인 2017년 삼성전자의 미국과 중국 시장 매출은 각각 48조8864억원, 45조7477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매출이 65조9617억원으로 5년 전과 비교해 34.9% 늘어난 반면 중국 매출은 54조6998억원으로 19.5% 증가하는 데 그쳤다. LG전자 역시 2017년 미국 시장 매출은 16조5425억원에서 지난해 19조7448억원으로 19.3% 늘었다. 반면 중국 시장은 같은 기간 3.6% 성장에 그치며 대조를 보였다.
가전과 스마트폰, 자동차 등은 상대적으로 중국 사업 비중이 높지 않아 미·중 갈등 장기화에 따른 악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수요 둔화 현상이 지속되면서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 공략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생산거점 상당수를 철수한 상황에서 마케팅만으로 현지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점과 자국 기업 강세가 더욱 뚜렷해진다는 점은 과제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미·중 무역갈등과 코로나19 유행 속에서 중국을 벗어나 미국 또는 베트남, 인도 등 제3국으로 생산거점을 재편하는 움직임이 많았다”며 “갈수록 중국 내 기술 유출 우려가 커진 데다 현지 사업도 자국 기업에 밀려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 정현정 기자 i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