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반도체 업계를 뜨겁게 달군 이슈가 하나 있다. 바로 영업비밀·기술 유출이다. 전 삼성전자 임원 출신인 한 업계 전문가가 재판에 넘겨졌다. 반도체 공장 설계 자료를 빼돌려 중국에 공장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가 핵심 기술이 중국에 넘어갈 우려에 국민의 공분을 샀다. 재판 결과가 나와야겠지만 영업비밀·기술 유출에 대한 ‘중국 리스크’ 걱정은 한층 깊어졌다.
최근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지난달 미국 등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위험제거(디리스크)’를 공동 성명으로 내건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도 중국과 거리를 두려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는 반도체 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력이 중요한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과의 협력을 추진할 때 항상 긴장하기 마련이다. 공동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술이 유출될 우려도 있고,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인력을 빼가는 사례를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을 수요 시장으로 접근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 견제로 첨단 반도체 기술 도입이 가로막힌 중국은 대안이 필요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우리 소재·부품·장비 업체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협력한 경험과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중국의 ‘러브콜’을 받은 소부장 기업이 상당하다. 초기에는 장비 공급을 요청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동 사업 협력과 투자 의사까지 내비친다.
국내 소부장 기업 역시 중국 리스크를 모르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중국 돈을 받아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뒤탈’이 생길 위험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업을 영위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가 많다. 한 반도체 장비 업체 대표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 모르지만 당장 직원들 월급을 주려면 수요가 있는 중국 기업에 장비를 납품하거나 사업 협력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들도 기술이나 영업 비밀 유출을 우려하면서도 당장 생존을 위해 중국 시장에 발을 내딛는다.
최근 반도체 경기가 위축되면서 이런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메모리 한파로 주요 제조사가 설비 투자 축소와 감산에 나섰다. 소부장 입장에서는 제품을 팔 시장이 줄어든 것이다. 반면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수요 시장이 크다. 위험을 감수하고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이 여럿인 이유다.
소부장 기업의 중국 진출은 공급망 관점에서는 위기다.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데 우리 소부장 기업이 편입된다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생태계는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수 밖에 없다. 판로가 많아 중국과 우리 반도체 제조사에 모두 제품을 공급한다면 상관없지만 산업 특성상 이 또한 쉽지 않다. 기술 유출을 우려해 경쟁사와 협력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소부장 기업의 활로를 중국이 아닌 국내로 열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반도체 제조사의 국산 소부장 사용을 늘려야 한다. 국내 제조사도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다각화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미 미국과 대만, 일본 등 주요국이 자국 중심 공급망 구축에 혈안이다. 김기남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이 지난 3월 공학한림원 포럼에서 “현대차 같은 완성차 업체가 국산 반도체를 많이 써줘야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반도체 제조사도 우리나라가 중심이된 소부장 공급망 구축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