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랩, 폐지 분쇄·가공해 종이 재생
물 사용 97%·이산화탄소 배출 40%↓
종이 외 모든 직물 인쇄하는 모나리자
디지털 안료로 폐수 등 환경오염 줄여
한 묶음의 폐지를 커다란 기계에 넣고 1분가량 흐르자 바로 옆 연결된 프린터에서 갱지와 비슷한 색깔의 새 종이가 쏟아진다. 그야말로 ‘헌 종이 줄게 새 종이 다오’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지난 24일 일본 나가노현 시오지리시에 위치한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를 방문, 세이코엡손(이하 엡손)의 업사이클 기술 정수로 꼽히는 ‘페이퍼랩’을 직접 확인했다. 히로오카 사무소는 엡손 프린터의 심장으로 일컫는 곳으로, 글로벌 연구개발(R&D) 거점이자 잉크 제조라인이 들어서 있다. 총면적은 일본 도쿄돔의 4.5배인 22만㎡이며, 총 6800명이 근무한다.
페이퍼랩은 사용한 종이를 파쇄해 섬유로 분해한 뒤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반복해 깨끗한 종이로 만드는 친환경 종이 재생 장치다. 여기에 적용한 독자 ‘드라이 섬유 기술’은 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분해·결합·가공한다. 기존 종이를 만들 때보다 물 사용량은 97%, 이산화탄소 배출은 40%나 낮춘다. 통상 종이가 나무로 만든 반면 페이퍼랩은 100% 폐지만을 원료로 만들기 때문에 목재 사용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양문형 냉장고 2개 크기와 비슷한 페이퍼랩은 A4용지 1장을 넣으면 분쇄·가공해 평균 0.7장의 새 종이를 만든다. 속도는 1분에 A4용지 약 12장, 1시간에 약 720장의 새 종이를 생산할 수 있다. A4, A3 크기는 물론 두께, 색상, 백색도 등 모두 조절 가능하다.
2016년 첫 공개한 페이퍼랩은 일본 내 기업·기관에 72대, 유럽에 3대를 공급했다. 대당 가격이 2억원이 훌쩍 넘을 정도로 고가인데다 사무실 내에서 폐지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수요가 생각보다 적어 확산은 더디다.
엡손은 시장 확산을 위해 2세대 제품을 준비 중이다. 이날 일부 소개한 2세대 제품은 종이 재생 속도를 높이고 가격 부담을 낮춘 게 특징이다. 한국에서도 연내 출시 예정이다.
엡손 관계자는 “현 제품은 파쇄기를 일체형으로 탑재한 반면 새로운 모델은 이를 분리해 여러 대의 파쇄기에서 나온 분쇄 폐지를 넣기만 하면 새 종이가 만들어 진다”며 “한 대의 페이퍼랩을 파쇄기를 갖춘 여러 사무실에서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프린터의 심장’답게 혁신 프린터 솔루션도 공개했다. 페이퍼랩 쇼룸 맞은편에 위치한 DTF(다이렉트 투 패브릭) 쇼룸은 나염 사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코모 지방을 테마로 화려하게 꾸민 공간이다. 도시 곳곳의 모습을 대형 천에 각양각색의 디자인을 엡손 프린터로 출력해 생생히 연출했다.
쇼룸에 전시한 엡손 ‘모나리자 64000’은 종이가 아닌 모든 직물을 인쇄할 수 있는 가장 큰 프린터다. 헤드만 64개를 탑재, 대형 현수막 크기의 직물 출력물도 문제없이 인쇄한다.
이 제품도 엡손의 친환경 기술을 망라했다. 폐수는 물론 인체에 닿아 발생한 건강 문제 등 기존 아날로그 염료 잉크 프린터 한계를 해소한 디지털 기반 안료(피그먼트) 잉크 프린터가 대표적이다. 기존 아날로그 프린터를 활용할 경우 평균 45~60일 소요됐던 직물 제작 공정도 디지털화되면서 3~14일로 대폭 줄었다.
특히 8개의 헤드를 탑재한 모나리자 8000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서도 대구 등 섬유 도시를 중심으로 꾸준한 수요를 보이는 ‘베스트셀러’ 모델이다. 지난해 10월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과 협업해 친환경 프린팅 기술로 제작한 옷들로 진행한 패션쇼 역시 ‘모나리자’가 큰 역할을 했다. 이날도 이상봉 디자이너가 히로오카 사무소를 방문, 친환경 패션쇼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엡손 관계자는 “패션 산업은 열악한 제조 환경과 폐기물, 색소로 인한 환경오염 등 다양한 부작용도 많은 영역”이라며 “사람 손이 반드시 필요한 아날로그 프린트와 달리 이를 최소화한 엡손의 디지털 프린터는 작업 환경 개선과 폐기물 감소, 물 절약 등 다양한 친환경을 구현한다”고 말했다.
나가노(일본)=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