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100인 100색 초세분화 시대의 고객경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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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배 LG전자 CX센터장 부사장

'A형은 소심하다'라는 말이 회자되던 시절이 있었다.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는 유사과학이 유행이던 그때엔 인간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요즘 사람은 혈액형 대신 MBTI를 묻는다. 이 테스트에 따르면 인간 성격 유형은 16가지이므로 몇 십 년 사이에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4배로 세분화된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기준이 너무 주관적이라든가 변별력이 없다는 비난이 팽배하다. 그렇다면 몇 가지로 인간을 나누면 될까. 또 기업은 고객을 어떻게 나눠 바라봐야 할까.

◇19세기에 '기생충'을 예언한 미시 사회학

'대중'이라는 거대 집단을 세분화해 바라보게 된 전환에는 미시 사회학이 있었다. 시작은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사회학자였다. 당시 짐멜이 활동했던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와 베버가 사회의 합리화나 자본주의 경제 등 거시 사회학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당시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큰 신체 기관 중심 연구가 작은 세포의 상호 작용으로 옮겨가고 있었는데, 사회과학 분야의 관심은 여전히 큰 사회 구조 연구에 머물렀다. 짐멜은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거시적 사회관계와 형식은 사실 개개인의 미시적 상호 작용을 통해 발생, 변화,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에 짐멜은 사소해 보이는 의례, 행위, 물건이 개인간 상호 작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냄새라는 작은 감각이 계급을 나눈다는 영화 '기생충' 속 메시지는 19세기에 짐멜이 신체 감각의 의미를 쪼개 분석한 저서 '모더니티 읽기'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후 거시 관점에서 미시 관점으로의 이행 경향은 사회학뿐만 아니라 산업계로 확산됐다. 1970년대 오일 쇼크를 겪은 기업은 위기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방편을 찾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떠한 위기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소품종 대량생산 기반 포디즘의 획일성과 경직성을 벗어나 다품종 소량생산 기반 포스트포디즘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사업 구조에 반영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인프라와 리소스, 제반 여건으로 포스트포디즘을 실현하기란 불가능했고, 이는 21세기로 진입하며 가능해지고 있다. 데이터, 인공지능, 로보틱스 및 다양한 자동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세분화된 고객에 대한 정확한 수요 예측, 유연하고 효율적인 생산라인과 물류 시스템 혁신이 진정한 포스트포디즘의 개화를 촉진하고 있다.

◇21세기 포스트포디즘과 고객 세분화

20세기 다품종 소량생산에 기반을 둔 포스트포디즘이 경제 위기에 대비한 예방에 가까웠다면 21세기 포스트포디즘은 고객 개인화라는 피할 수 없는 변화에 대응하는 생존 전략에 가깝다. 타깃 고객 집단을 선정하기 위해 전체 고객을 동일한 가치 추구 집단 별로 나누는 고객 세분화 (세그멘테이션)는 사업의 기본 활동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령과 성별, 세대, 가족 구성, 거주지, 학력 등 생물학적, 사회적 특성에 따라 고객이 추구하는 가치가 유사했고, 이에 따른 고객 세분화가 유효했다.

그러나 고객 생활과 추구 가치가 다양해지면서 인구통계학적, 세대적 특성에 따른 집단 밀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기업은 다양한 가치 측정 수단을 찾아 생활방식, 습관 및 취향 등 이전에 없던 기준에 따라 고객을 세밀하게 분류해야 사업 적중률을 높일 수 있게 됐다. 고객 초세분화(마이크로 세그멘테이션)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첫째, 고객은 더 오래 산다. 일본과 유럽은 전체 인구 중 65세 인구 비율이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가 된지 오래고, 한국과 미국은 14% 이상 고령 사회다. 문제는 나이와 무관하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노인'이 되는 시점이 늦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고령화란 겉으로는 성인인지 노인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른이 누적되는 시대로 변화를 의미하고, 이런 시대에 연령 기반 생물학적, 사회적 특성으로 고객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

둘째, 고객은 더 많이 혼자 산다. 필자는 이렇게 혼자 사는 사람을 '1인 가구'가 아닌 '1인 생활자'라 부른다. 1인 가구는 법적으로 한 집에 혼자 사는 사람을 말하며, 우리는 흔히 가정을 꾸리기 전에 혼자 사는 미혼자를 먼저 떠올린다. 기러기 아빠나 독수리 아빠, 이혼이나 졸혼 또는 사별 이후 혼자 사는 가정도 여기에 해당하겠다. 그러나 실질적 1인 가구는 그 이상이다. △친구, 형제자매끼리 사는 다인 가구 △하숙이나 쉐어하우스 거주자 △부모와 사는 비독립 성인 및 각자 생활이 천차만별인 3~4인 가정 등 물리적으로 1인 가구는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는 1인 기반 생활과 소비뿐 아니라 규정에서 벗어난 다양한 생활방식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셋째, 고객은 더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산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및 경기변화를 체감하면서 고객이 인지하는 환경 변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고객은 감염, 재난, 경기침체는 물론이고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취향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러한 고객에게 단순히 연령, 세대적 관점의 필요와 욕구만 충족시키는 일은 충분할 리가 없다.

이렇게 고정적인 고객의 유효성이 떨어지는 가운데, 시기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고객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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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로 고객을 이해하는 법

고객은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가진 인간이고, 인간은 유기체다. 유기체로서 인간은 하나의 기준으로 정의하기 어렵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자신을 유연하게 정의한다. 타고난 성별조차도 사회 규정에 따라 정의하기를 거부하고, '부캐'나 '아바타'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기도 한다. 주부의 퇴직이나 비혼자를 위한 축의금처럼 전에 없던 생활문화나 의례를 창조하기도 한다.

기업은 고객을 멈춰 세운 이후 단일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정의하고자 하지만 고객은 언제 어떻게 튀거나 변할지 알 수 없다. 유기체적 고객(Fluid Customer)을 이해하고 공략하는 방법은 그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유의미한 순간을 포착하고 엮으면서 생활과 경험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근래에는 포털, SNS, 다양한 기업의 멤버십에 고객 데이터가 누적되고 있다. 소비자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남긴 빅데이터를 발굴하고 행간을 읽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들이 온라인 공간에 남긴 흔적만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가치관, 생활습관 및 취향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테면 그들의 공간은 자기만의 방에 한정되지 않고 자동차까지 뻗어 있다. 그들이 보내는 시간은 하루로 볼 때와 일주일로 바라볼 때가 엄연히 다르다. 그들의 시·공간은 가족이나 지인 사이에 존재하는 역학 관계의 영향도 받는다.

따라서 구멍 난 퍼즐을 맞추듯 서베이, 관찰, 인터뷰와 같은 스몰 데이터를 기반으로 빅데이터로 짜 맞춰진 입체적 고객 라이프스타일에서 부족한 부분을 추정해 메우는 일은 필수다.

LG전자는 서베이와 고객행동연구 기반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한 플랫폼을 개발했다. '라이프그라피'로 명명한 플랫폼은 고객 삶을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렌더링 할 수 있다. 고객을 다양하게 세분화할 수 있고, 세분화된 유형별 추구 가치를 바탕으로 고객이 원하는 콘셉트와 디자인을 유추하여 개발할 수 있다.

LG전자 '무드업 냉장고' 개발에도 플랫폼이 활용됐다. 연구원들은 라이프그라피를 통해 고객 경험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냉장고의 교체 주기가 빨라지고, 과거에 비해 집 안에서 파티를 즐기거나 새로운 인테리어를 추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특히 해당 특성을 지닌 고객들이 예술적인 공간 구축과 스토리가 있는 경험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신의 삶에 꼭 맞는 컬러 변화가 가능한 솔루션을 원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외에도 라이프그라피 시스템의 분석 결과는 냉장고와 관련한 다양한 핵심 고객 요구를 담고 있었다. 고객 연구원들과 디자이너들은 수 차례에 걸친 아이디어 발상 워크숍을 통해 라이프그라피 내용을 해석할 뿐 아니라 다양한 고객 검증 과정을 거쳐 새로운 냉장고 컨셉트를 완성했고, 스마트한 외관 컬러 변경이 가능한 무드업 냉장고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취향 변주 시대의 고객 경험 이해

건강, 행복, 교류처럼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고객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와 교육 수준 향상 같은 시대상 변화로 고객 취향은 매순간 더 구체화되고 다양해지고 있다. 새로운 공간, 상품, 미식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는 고객 오감은 더욱 섬세해지고 경험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져간다. 제품이나 서비스 개발에 일정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고객 취향을 따라잡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고객 경험 혁신을 위한 수단으로 데이터를 통한 고객 초세분화가 가능해진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라이프그라피처럼 기술 진보로 가능해진 다양한 고객 분석 도구를 활용한다면 고객 기대를 뛰어 넘는 탁월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철배 LG전자 CX센터장 부사장 cxcenter@lge.com

◇ 이철배 LG전자 부사장은 전사 관점의 고객경험(CX) 혁신과 상품·서비스·사업모델 기획 등을 통한 CX혁신 가속화를 추진하는 CX(Customer eXperience)센터를 맡고 있다. 1993년 LG전자(옛 금성사) 입사 이래 CX 기반 디자인 정체성 확보, 경쟁력 강화 및 다양한 비즈니스 혁신 기회를 발굴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LG전자 이노베이션사업센터장, 뉴비즈니스센터장, 디자인경영센터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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