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구형 아이폰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렸다는 의혹과 관련해 국내 소비자가 집단 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성능조절 기능이 반드시 사용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거나 불편을 초래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수천억원대 배상금 지급이 이뤄진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는 애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김지숙 부장판사)는 2일 소비자 9800여명이 애플코리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소송 비용도 소비자가 부담하도록 했다.
애플은 앞서 2018년 3월 아이폰6 시리즈와 아이폰7 시리즈, 아이폰X 등 10여종에 iOS 업데이트를 하며 배터리 상태에 따라 성능을 제한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해당 기능에 대한 이용자 사전 고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랐다. 고의적인 성능 저하로 아이폰 속도를 느려지게 해 불편을 느낀 이용자가 자연스럽게 신형 아이폰을 구매하도록 유도했다는 지적이다. 국내에서도 소비자단체와 법무법인을 중심으로 집단소송이 제기됐다.
국내 소송에는 당초 소비자 6만여명이 참여했다. 재판부가 소송 대리 위임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최종 9850명으로 원고가 확정됐다. 재판에서 소비자 측은 “고성능을 기대하고 아이폰을 샀는데 기능이 제한된다면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부는 “성능조절 기능이 없었다면 아이폰 전원 자체가 꺼질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수 있어 고성능 애플리케이션을 구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제품 구매 유도 의혹과 애플이 고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 일부 원고는 해당 업데이트를 설치한 사실 자체가 증명되지 않은 점이 패소 이유가 됐다. 업데이트 설치로 인한 성능 저하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점도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가 패소한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는 해당 모델 아이폰 이용자 1인당 25달러 배상을 받았다. 미국 법원의 징벌적 손해배상 판결을 우려한 애플이 선제적으로 합의에 나서 논란을 종식시켰다. 칠레에서도 집단소송으로 2021년 25억페소(약 37억원) 지급에 합의했다. 영국 경쟁항소법원(CAT)에서는 애플을 상대로 한 7억6800만파운드 규모 소비자 집단소송이 진행 중이다.
프랑스에서는 경쟁소비부정행위방지국이 소비자가 불리한 내용에 대해 사전 고지가 없었다는 책임을 물어 애플에 2500만유로 벌금 판결을 내렸다.
박정은기자 je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