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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장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메가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2021 주요 기업의 사회적 가치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기업(103개사) 가운데 88.4%가 ESG 경영 투자를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을 고려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기업을 움직이는 강력한 이해관계자인 '투자자'와 '소비자' 가치판단 기준이 변화하면서 ESG 경영은 단순히 바람직한 가치 추구 행위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을 결정하는 필수 전략이 된 까닭이다.

◇메가트렌드 'ESG' 경영

2020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인 래리 핑크가 투자자와 기업 CEO에게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부의 흐름이 ESG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글로벌지속가능투자연합(GSIA)에 따르면 2020년 6월을 기준으로 글로벌 ESG 자산은 40조5000억달러로, 2년 전 대비 31% 증가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는 ESG 관련 자산 규모가 2025년에는 50조달러 이상으로 증가, 세계 운용자산의 3분의 1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지속 가능성을 중심으로 구매 의사결정을 하는 새로운 소비 흐름도 ESG 경영이 급부상한 이유로 꼽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실시한 'ESG 경영과 기업 역할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3%가 기업의 ESG 활동이 제품 구매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ESG 경영에 부정적인 기업 제품을 의도적으로 구매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70.3%다. 응답자의 88.3%는 ESG 우수 기업 제품의 경우 추가 가격을 지불하고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중소기업, ESG 경영 도입에 난항

ESG 실천이 중요해지지만 당장 생존에 필요한 수익 창출에 집중하느라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가 30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중소기업 ESG 애로조사'에 따르면 ESG 경영 도입에 대한 경영환경(인력·조직·소요비용 등)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어렵다고 느끼는 기업이 89.4%에 달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ESG 관련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고 투자자, 소비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ESG 요구가 증대하고 있어 중소기업 또한 ESG 경영이 필수가 됐다. 특히 대기업의 협력사 ESG 동참 요구가 증가, 기업 거래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면 ESG에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됐다. 중소기업이 국가 경제와 산업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중소기업의 ESG 경영을 도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디자인', 중소기업 ESG 혁신 대안

디자인이 대안일 수 있다. 디자인의 본질은 통합적 사고를 통한 문제 해결이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디자인 컨설팅 기업으로 불리는 IDEO의 CEO 팀 브라운은 디자이너가 디자인 과정에서 사고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디자인 싱킹'을 “사람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호감도, 기술적 실현 가능성, 경제적 생존 가능성을 조화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디자인 분야는 기술적으로 구현이 가능하면서 이윤을 남기는 동시에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해 왔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비즈니스 전략과 고객 공감을 이끄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논리를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해서 고객만족도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기업 이윤을 창출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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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통합적 사고를 통한 문제해결

디자인 융합적인 특성은 기업이 경제·기술적 문제를 고려해서 고객이 요구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현실적인 ESG 실현 방법을 고안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영리 행위가 본질인 기업이 경제 성과를 뒤로 하고 지속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고객이 공감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ESG 경영 실천은 'ESG 실패 사례'로 남거나 'ESG 워싱'으로 낙인찍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이윤 창출과 가치 창출의 균형이 중요하다. 통합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디자인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다. 디자인 활용을 도우면 중소기업의 ESG 혁신을 견인할 수 있다.

지속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디자인을 활용하는 기업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2020년 롯데칠성음료는 국내 최초로 페트병 몸체에 라벨을 없앤 친환경 디자인 생수 제품인 '아이시스8.0 에코'를 출시했다. 분리배출의 편의성과 페트병 재활용률을 높인 '아이시스8.0 에코'의 지난해 판매량은 약 2억9000만개로, 전년 대비 1670% 증가하는 높은 성장세를 보이며 음료업계의 '무라벨 트렌드'를 주도했다.

볼보자동차는 '의식 있는 디자인의 부상'이라는 주제의 보고서를 통해 친환경 소재를 활용한 자동차 디자인으로 ESG 경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삼화페인트는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장애나 색각이 있는 사람이 제품과 서비스 등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색상을 설계하는 '컬러 유니버설 디자인'을 개발, 장애인 이용시설에 도입했다.

그렇다면 중소기업의 ESG 실현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디자인 활용을 지원해야 할까. 우선 디자인컨설팅, 인력 지원 등을 통해 디자인을 경영 혁신전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 예로 에스와이메탈은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의 '디자인주도 제조혁신지원사업'을 통해 디자인 컨설팅을 받아 20년 넘게 주조·주물 산업에 종사해 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친환경 제품인 '동합금 주조 디자인 가구'를 개발했다.

알루미늄과 황동 폐자재로 만들어진 리사이클링 소재를 적용한 이 제품은 단순히 환경적 가치를 살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체 상품 개발을 통해 대기업 납품 위주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비재 신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됐다. 이처럼 중소기업이 경영 과정에서 디자인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도우면 ESG 가치 창출과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중소기업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ESG 관련 디자인 R&D를 발굴하고 그 성과를 확산시킬 필요도 있다. 영세한 중소기업이 ESG를 목적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KIDP의 경우 중소기업의 디자인 연구개발 부담을 줄이기 위해 'CMF 디자인핵심기술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CMF는 색상(Color)·소재(Material)·마감(Finishing)을 뜻하는 말로, 친환경 제품 디자인의 핵심 요소다.

실제 CMF 디자인을 거쳐 친환경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 중소기업 사례도 있다. 한국고서이엔지는 KIDP가 운영하는 디자인 주도 제조혁신센터를 통해 디자인 컨설팅부터 시제품 제작, 양산 컨설팅까지 제품 개발 전 주기 지원을 받아 친환경 컬러 보도블록을 개발했다. 그 과정에서 굴패각 재활용 소재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있는 CMF 디자인으로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였다. 디자인을 통해 친환경 소재의 강점을 살린 한국고서이엔지의 보도블록은 조달청 혁신시제품 및 녹색인증기술제품으로 등록돼 올해 매출이 크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CMF 디자인을 연구개발해서 확산시킨다면 중소기업 친환경 혁신 성공사례를 더 많이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KIDP는 CMF 디자인핵심기술개발사업을 통해 중소기업 지원용 CMF 디자인 시스템과 프로세스 체계를 개발하고 중소기업이 사용할 수 있는 CMF 정보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디자인 기반의 ESG 혁신 사례를 발굴해 디자인 활용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현장을 방문하다 보면 디자인 가치를 인지하지 못해서 디자인을 활용하지 않는 기업이 많다. 특히 중간재 기업은 디자인이 소비재 개발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디자인은 완성품 제작뿐만 아니라 ESG 실천에도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례로 접착 및 표면처리 기업인 대영R&T는 KIDP가 개발한 근로자 중심 안전디자인을 작업 현장에 적용했다. 안전 표지판 부착, 도색 작업을 통한 작업 동선 관리, 조도 개선, 안전 매뉴얼 가이드 개발 등으로 산업재해 잠재발생 요인을 시각적으로 쉽게 인식하도록 하는 한편 사고 발생 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개선했다.

디자인은 기업 성격과 관계없이 ESG 경영 실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기업들이 스스로 ESG 역량을 기르는 데 디자인을 활용할 수 있도록 모범 사례를 발굴해서 디자인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 일본의 디자인계 거장 하라 겐야 무사시노미술대 교수는 '디자인의 디자인'이라는 저서에서 “사회의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 디자인의 본질이 있다”고 말했다. ESG는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고민이 모여서 형성된 개념이다. 따라서 문제의 발단을 사회에 두고 그 해결법을 찾는 디자인으로써 우리 기업의 ESG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기업이 디자인경영을 내재화해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윤상흠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 syoon@kidp.or.kr

<필자>윤상흠 원장은 1991년 제35회 행정고시 합격 후 산업자원부 자원팀장, 지식경제부 무역구제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통상협력총괄과장·무역조사실장 등을 역임했다. 통상·무역 분야 전문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 1조달러 달성에도 기여했다. 지난해 제17대 한국디자인진흥원장 취임 후 '현장에 답이 있다'는 철학에 기반해 디자인 전문기업 방문 등 현장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통상·무역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망 디자인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에 노력하고 있다.